딱딱이는 방에 앉아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를 읽고 있다.
[나는 친구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공부를 하자고 모였으면 공부를 해야지. 모여서 떠들 거면 왜 공부를 하자고 모였을까.]
짜식 초딩때부터 꽤나 까탈스러웠네. 딱딱이는 엷은 미소를 띠며 생각한다. 모여서 공부 좀 안 했다고 친구들이 그렇게 싫었을까.
곧 마흔을 바라보는 어른 김딱딱씨는 불혹 전에 많은 경험을 해볼 작정이다. 한 번은 걷기 모임엘 갔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걷기 코스를 함께 걸으니 운동도 되고, 혼자 보러 가기 뭣했던 서울의 야경을 볼 수 있었다.
”딱딱 씨. 좀 천천히 가요. 우리는 이야기하면서 가느라 느려요. 딱딱 씨도 같이 천천히 가요.“
걷기 모임에서 걷기를 잘했던 김딱딱은 묘한 패배감을 느낀다. 운동복 차림에 백팩을 멘 김딱딱은 생각한다.
‘네 옆에 철썩 붙어서 걸어오는 여자 눈빛이 나를 째려보고 있는데 내가 퍽이나 가고 싶겠다.‘
모임은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지어 나란히 소개팅을 하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조금 늦게 파악한 딱딱 씨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말을 걸었었다. 진한 아이 메이크업에 페미닌한 옷을 입은 그녀는 딱딱 씨의 질문에 단답으로 응했고 그제야 그녀의 무관심을 간파한 딱딱 씨는 걸음의 속도를 높였던 것이다.
모임에 공지되어 있던 걷기 코스의 아직 절반도 안 걸은 것 같은데 모임장은 분위기 있는 루프탑 카페로 모임원들을 데려갔다. 걸음이 빠른 딱딱 씨는 가장 구석진 자리를 발견해 앉아서 옆 테이블에 앉은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딱딱 씨와 같은 팀인 남자들을 양 옆에 한 명씩 두고 그들과 티격태격하는 중이었다.
“아우! 왜 이렇게 까칠해?“
남자들은 그녀의 앙탈에 대답했다.
“회사에서도 이렇게 까칠한 거 아니에요?”
말은 그래도 남자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이 장면들이 낯설지 않다고 딱딱 씨는 생각했다.
딱딱 씨는 책 읽는 걸 좋아해 독서 모임이라는 것도 했다. 책 이야기는 2시간 반이지만, 술을 먹는 걸로는 밤을 새우는 모임이었다. 막차 전에 귀가하는 사람인 딱딱 씨는 놀랐다. 그래도 딱딱 씨는 언제나 가장 먼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올렸고, 열심히 모임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들과는 섞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모임 여러 번 하면 썸 생긴다는데, 여러 모임에서 활동한 딱딱 씨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딱딱 씨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며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평소 안 하던 과음을 하고 혼자 알딸딸해져서는, 딱 막차 시간에 맞춰 귀가를 했다. 첫눈이 소복소복 얇고 곱게 쌓인 밤이었다. 딱딱 씨의 세상처럼 고요한 밤, 고요한 집안 문을 열고 집에 도착했다.
[집 도착했어요.]
아무도 먼저 질문하진 않았는데, 딱딱 씨는 혹시나 누군가 자신의 귀가를 걱정할까 봐 먼저 단톡방에 카톡을 남겨놓는다. 다른 모임원들은 딱딱 씨의 카톡을 읽을 겨를이 없다.
마음 맞는 인연이 될 것 같아 누군가와 자리를 만드는 것도 그때뿐, 그녀는 곧 투덜댈 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갔고 그도 역시 그녀와 술이 있는 자리에만 나타났다. 모임의 목적이란 무엇일까? 탈퇴 버튼을 누르고 딱딱 씨는 생각한다.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것일까?’
딱딱 씨는 차라리 본인이 못하는 걸 배울 수 있는 곳에 가기로 했다. 요리 원데이클래스였다. 관계의 공허함을 배움으로 채우리라.
하지만 모임에 빠질 수 없는 양념처럼 요리 팀도 남녀 짝짜꿍이 맞춰졌다. 여성에게 팀 지목권이 주어졌다. 요리판 <나는 솔로>인가? 딱딱 씨는 선택을 받지 못한 20대 청년 한 명이 있는 팀을 골랐다. 무슨 말이든 말랑말랑 웃으며 적극적으로 대꾸해 주는 그가, 김딱딱씨가 껍질 안에 숨겨 둔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요리와 시식은 토요일의 이른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오후 1시쯤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무언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들은 일정이 바빴다. 그들은 쭈뻤쭈뻣 고민하더니,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한 명씩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딱딱 씨와 20대 청년은 먼저 빠져나간 이들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그릇들까지 함께 설거지를 했다. 요리 실력보다 설거지 실력을 발휘했던 그날의 모임도 끝이 났다.
딱딱 씨는 탈퇴했던 독서 모임 회원가입을 다시 진행하며 그냥 좋아하는 일이나 맘껏 하기로 한다.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을 만나던 흔들리지 않는 건 결국 딱딱 씨가 좋아하는 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람과 사람이 견제하는 것을 넘어 이상한 경쟁들을 하고 있고, 김딱딱씨의 껍질을 더 굳게 만드는 술자리 문화가 있고, 목적만 달성하고 날름 떠나버리는 철새들이 있는 곳일지라도 말이다. 빌런은 더 강력한 빌런으로 밀어버리리라. 딱딱 씨는 더욱 강력한 빌런이 되어 당기는 대로 하기로 한다. 쓰고 싶은 글 쓰고 빠지고 싶으면 빠지고 가고 싶은 모임에만 간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모임이 끝나고도 계속 교류하고 싶다고 선톡을 보내준 작고 귀여운 아가씨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딱딱 씨가 글 올리는 브런치 주소 오늘 꼭 물어봐야지 생각하고 나왔는데요.”
딱딱 씨는 부끄러운 글이 적힌 브런치 주소를 끝내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귀여운 목적을 알고 수줍게 웃던 딱딱 씨는 그때부터 무겁던 껍질을 한 겹 씩 벗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