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심장에 대한 음악이 과거로 되다.
인문학을 공부하시는 선생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얘들아 예술은 과거의 별을 탐구하는 거야.'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셨다.
'밤하늘의 별을 봐봐. 모두 과거의 별들이지? 예술도 같은 거야.'
이 말을 하실 때의 선생님의 말투, 몸짓,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시질 않는다. 매우 인상 깊은 말이었으며, 마치 심장을 강타당한 느낌이라는 말로만 듣던 표현을 음악 외에서 처음 경험하였다. 이 말에 깃든 옥구슬은 그 무엇보다도 명료하였다.
예술, 특히 난 음악만큼은 절대적으로 과거의 별들이 더욱 빛난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빛나는지 거리의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멂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가까이 있는 현재의 별들에 비해 겉보기에도 과거의 별들이 더 빛나게 보인다.
과거의 음악가들은 모든 별 개개인이 그들만의 독창적인 음악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음악가들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글쎄 그것을 상대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과거의 음악가들이 더 독창적이며 진정한 음악의 길을 개척하였다고 생각이 들지 않나?
Vladimir Horowitz를 생각해 보아라, 얼마나 독창적이면서도 정수가 느껴지는 연주인가? Sergei Rachmaninov의 연주를 생각해 보아라, 그 자신의 곡, 또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연주한 녹음을 들어보면 그 엄청난 개척의 길과 너무나 많은 심상이 그려짐으로 인한 당신 심장의 쿵쾅거림 때문에 어쩌면 당신이 있는 장소의 땅이 갈라지며 투명한 유리 비가 거꾸로 내릴 수도 있다.
현재의 음악가들을 보았을 때 위 두 명, 또는 다른 과거의 음악가들과 같이 연주하는 사람이 몇 있겠는가? 누구든 이 질문에 두 자릿수 숫자를 절대로 답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의 음악가들이 빛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탐구하는 임윤찬이, 이것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근본 있는 음악가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근본 있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 근본 있는 음악가가 되려면 첫 번째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깊게 깔려있고 정말 두려움 없는 표현을 하는 사람, 그리고 굉장히 진실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말 예측 불가능한 타이밍에 가볍게 던지는 유머가 있는 음악가인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연주를 귀로 듣고 머리로 '연주 정말 너무 좋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연주가 있고, 그 연주가가 음을 치자마자 귀가 들을 시간 없이 그냥 심장을 강타하는 음악이 있는데, 본인은 심장을 강타해 버리는 그런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이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근본 있는 음악가가 되는 것은 사실 노력으로 될 것이 아닌 것 같고 그냥 시대가 내린 천재들만이, 축복받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건데,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진실되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에 따르면 근본 있는 음악가, 즉 과거의 음악가들이 가졌던 소양을 의미하는 무어는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매우 진실돼야 한다고 한다. 이러면서도 관객을 놀라게 할 가벼운 유머, 현재의 음악가들에서는 찾기 쉽지 않지만 과거의 음악가들에서는 적잖이 볼 수 있는 소양들이다.
또한 '두 번째로는~생각한다.', 이 문장을 보고 여러 연주를 들어보면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말한 심장을 강타하는 음악이 아닌 음악들이 하등 한 음악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근본에 따르면, 심장을 강타하게 되는 음악들이야 말로 진정한 음악에 좀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이것이 대체로 현재의 음악가들보단 과거의 음악가들에 다수 분포돼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포 양상이 왜 발생한 것인가? 그는 이에 관해 두 가지 원인을 뽑았다. 첫 번째는 콩쿠르, 두 번째는 발전된 녹음 기술. 녹음 기술에 관해서는 저번 글에서 다룬 바 있으니, 여기선 콩쿠르에 관해 나와 같은 사람들의 견해를 적어본다.
콩쿠르,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음악, 미술, 영화 따위를 장려할 목적으로 그 기능의 우열을 가리기 위하여 여는 경연회'이다. 장려할 목적, 그것의 본래 의미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위한 수단은 누군가에 의해 너무나 쉽게 변질될 수 있다. 사실 목적만이 음악에 손을 댈 수 있을 자격이 주어질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콩쿠르의 과정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소리다.
그러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순위를 매기는 것은 정말 의미가 없는 짓이다. 아주 거대한 콩쿠르에서 떨어진 자가 그만의 고유한 음악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도 열심히 연습하였으며, 음악과 영혼이 끝없는 교류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의 산물을 한 순간에 무너지게 하는 것이 콩쿠르일 것이요, 이것은 그들에게 큰 착각을 주기 매우 쉽다.
어떤 착각을 안겨주는가, 사실 이미 사회엔 이미 이런 계략의 악마가 널리 퍼져있기에 이것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나의 밑거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반복된 경험이 많아도, 또한 반대로 경험이 적은 이라면 당신의 마음에 깊은 흠을 파고 그 안에 아주 교묘한 악을 집어넣기 일쑤다.
이 악은 당신의 정신까지 영향을 끼쳐 자신을 자책하여 자부심이 증발될 수 있으며, 우울감에까지 빠질 수 있다. 이건 많은 현재의 음악가들, 또는 그것을 위해 달려 나아가는 많은 청소년들이 콩쿠르로 인해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아, 나를 포함해서.
또한 이것의 문제점, 평가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가치관이 반영되기 매우 쉽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음악엔 객관적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전부 주관적인 것이다. 이에 따라 연주자는 최대한 많은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통용적인 길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는 과거의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따르기 힘들어지는 지름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을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악의 무리를 데려오는 성질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음악에서 조차 발견되니, 이 얼마나 규탄스러운 일인가?
물론 콩쿠르의 장점도 있다. '장려할 목적'을 잘 고정시킨다면 뛰어난 연주자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조성진이나 임윤찬을 생각해 보면 편하다. 그들은 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음악가다운 연주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세상은 안타깝게도 1등만 기억해 주도록 교육이 되었다. 200명이 그런 무대에 오른다면 1명뿐만이 기억된다는 것이다. 물론 약간의 과장은 있으나, 이의가 있다면 한 번 과거를 생각해 보아라.
2015 쇼팽 콩쿠르의 1등, 조성진이 아닌 다른 참가자의 연주를 조성진 연주만큼 많이 들어보았는가? 2022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1등, 임윤찬이 아닌 다른 참가자의 연주를 임윤찬 연주만큼 많이 들어보았는가? 대부분 아니할 것이다. 그들의 Final Round 연주 영상의 조회수가 2025/01/14 기준 각각 1855만,1657만 회이다. 임윤찬의 경우 라흐마니노프 영상의 조회수만 적었다.
저 숫자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 체감이 되는가? 아마 조성진, 임윤찬의 그 콩쿠르 연주 영상을 제외한 각각 그때의 콩쿠르 모든 연주 영상의 조회수를 더해도 저 숫자만큼은 되지 않을 것이랴.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이다. 왜인가? 수많은 참가자 중 딱 한 명만이 저렇게 빛나는 것 아닌가. 쇼팽 콩쿠르로 예를 들면 5년에 한 번 약 150명 중 한 명이 빛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정당당히 심사위원들에게 점수를 받아 가장 높은 점수를 차지하고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이 무어가 잘못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간과해야만 튀어나올 수 있는 질문일 것이다,
콩쿠르에 출전한 사람들 중 연주를 못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매우 큰 국제 콩쿠르 같은 경우엔 대부분의 참가자가 모두 뛰어난 음악가일 것이다. 한 번 그들의 연주를 실제로 웅장한 홀에서 들어본다면, 당신의 생각은 내 말처럼 바뀔 것이다.
1등과 꼴등의 실력차는 있겠지만, 큰 규모의 콩쿠르는 꼴등조차도 그 사람만의 특별함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가 그 꼴등을 한 사람을 기억해 주겠는가?
콩쿠르의 비판은 여기서 짚일 것이다. 매우 변수가 많고, 운이 잘 따라 줘야 하는 요소도 매우 많다. 빼어난 음악가임에도 실수를 한 번만 해도 떨어지기 쉬운 것이 콩쿠르이다. 이것은 현재 매우 잘못된 길로 변질되었다. 특히, 작은 콩쿠르에 경우는 훨씬 심하다.
작은 콩쿠르, 학생들이 많이 참가하는 콩쿠르로 예를 들자면 그것은 음악을 다루는 공간이 아니다. 시험을 다루는 공간이다. 애초에 구조가 잘못되었다.
이것의 분위기는 살인적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수능을 보고 있는 교실에서 대기하다가 나와서 연주를 하는 느낌이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선보이겠는가?
작은 콩쿠르는 콩쿠르를 위한 설계를 우선적으로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다. 오로지 콩쿠르가 끝난 뒤 그 장소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런 것을 지향하는 듯 보인다. 콩쿠르를 다른 일정에 방해되지 않게 최대한 빠르게 끝내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한국에선 연주를 2분 정도 듣고 끊는 것이 통상적이며, 매우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내 눈엔 마치 북한에서 통제받는 것과 같이 되는 체계로 말이다. 이게 어떻게 음악을 장려할 목적으로 다루는 경연 대회일 수 있겠는가? 이것을 즐긴다면 과거의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계승할 수 없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2021 쇼팽 콩쿠르 우승자 Bruce Liu가 한 인터뷰에서 쇼팽 콩쿠르에 관해 질문을 받았는데, 그는 '컴페티션은 말들이나 하는 거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답까지 한 바 있다.
아! 이 글의 주제를 잊어버릴 뻔했다. 이 글의 주제는 파멸적인 콩쿠르가 아니다, 이 글의 주제는 이데아를 향해 도전의 불꽃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거의 별들이다. 그들을 떠올리니 방금까지 글을 쓰면서 느낀 답답함이 풀리는 느낌이다. 고구마와 사이다가 생각난다, 하늘을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땅을 보고 있는가.
아! 지고에 가까운 과거의 별들이여! 그들은 진정 이데아에 가까운 음악을 실현시켰지만, 왜 현재의 별들은 그러하지 못한 것인가!
진정한 음악을 다루셨던 과거의 음악가들, 이 단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여기선 다들 작곡가로 많이 알고 있는 Sergei Rachmaninov의 연주에 대해서 말해볼까 한다.
V. Sofronitsky는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리스트는 유럽적이며, 루빈스타인은 전 세계적이며, 라흐마니노프는 우주적이다."
유럽, 전 세계, 우주. 무엇이 가장 와닿지 않고 거대해 보이며 범접할 수 없어 보이는가? 두말없이 우주일 것이다. 우주는 21세기 현재에도 다루기 매우 어려운 미지의 존재일 것이다. 소프로니츠키가 그를 우주에 비유했으니, 그의 연주는 대체 얼마나 참되었겠는가?
라흐마니노프는 사실 일반인들에겐 연주보단 작곡가로 유명할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의 연주는 그의 작품 못지않게 빼어나다.
내 기억으로 어떤 곳에서 피아니스트 등수를 매겼던 것을 보았었는데, 1등이 라흐마니노프, 2등이 루빈스타인, 나머진 기억 안 나고 5등이 호로비츠인가 그랬던 것 같다.
역시나 매우 의미 없는 짓이다, 심지어 이것은 더더욱 말이다. 아까 누가 말했지 않나. 꼴등도 그 사람만의 특별함이 있다고. 근데 이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저런 엄청난 거장들한테 등수라는 정이나 박고 있으니 망치가 당연히 부서질 것이다. 그 정은 세상에 존재해선 아니 되며 절대로 박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1등만 기억해 주는 더러운 세상! 누가 아까 이것을 비판하였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니 그런 적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에 모순이 생긴 것 같다. 난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이지 말이다.
아무튼 1등은 라흐마니노프이다! 그가 아주 뛰어난, 아니 이런 수식어조차도 참으로 결여한 음악가들을 제치고 1등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의 연주는 매우... 어... 그냥 수식어를 붙이지 말자. 뇌가 곧 있으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다. 그의 연주는 마치 마법 같다. 비유가 아니라 듣고 있으면 진짜 마법에 걸린 것 같다. 아니 진짜라니까?
그의 여러 연주 중 듣다가 충격을 하나 먹은 연주가 있다. 바로 F. Chopin Piano Sonata No. 2 in B-Flat Minor, Op. 35이다. 매우 유명한 쇼팽의 곡 중 하나이다. 장송 행진곡, 매우 무거운 음악임에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연주를 듣고 난 머리를 스물일곱 대는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에 비판의 일침을 날리는 느낌이었다. 아마 이 연주, 그리고 옛날 연주를 많이 듣지 않는 이라면 분명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여러 머리를 강타당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중 단연코 가장 강력한 강타는 단연코 3악장일 것이다.
난 이 곡을 현재의 음악가들의 연주만을 많이 들어봤다.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이 악장을 그 템포로 연주하는 사람을 처음 들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이제 더 이상 원래 템포의 연주들은 못 듣겠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은 분명 머리를 세게 맞아 내 뉴런에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난 이것을 사랑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그뿐이겠는가, 그는 매우 독특한 어투를 우리에게 선보였다. 다이내믹을 반대로 표현한 것이다. 전부는 아니고, 특정 단락에서 그의 작곡가 기질을 볼 수 있는 요소가 선명히 들린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작곡가의 기질이라고 말하는 것보단 영혼의 심장에 대한 음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임윤찬이 M. Mussorgsky의 Pictures at an Exhibition을 연주했을 때, 여러 기사가 떴었다. 난 무슨 기사를 보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진 줄 알았다. 연주는 못 보고 기사만 보았는데, 호로비츠 버전에서 또 편곡을 가미한 것은 별 거 아니라도 악상 기호를 반대로 연주했다느니 뭐라니 상상이 안 되는 괴상한 말들이 적혀있었다. 난 무슨 아랍어를 보는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그건 아랍어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Verbier Festival에서 연주한 그의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난 아랍어를 완전히 통달하였다.
انظر، أليست في حالة رائعة الآن؟ قوة المترجم لا تصدق.
그의 어투도 매우 특이하였다. 정말 다이내믹을 반대로 연주한 부분도 있었다. 역시 임윤찬은 임윤찬인지라 그의 연주는 과거의 별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영혼의 연주가 보였다. 그 반대의 다이내믹은 라흐마니노프의 그것과 방향성이 흡사한 것처럼 들렸다. 둘 다 그냥 대놓고 반대로 연주했다. 매우 직관적으로 말이다. 그 곡의 작곡들이 무덤에서 번쩍 일어나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의 연주를 감상하랴.
그러나 그 반대의 연주에서 우러나온 것은 영혼의 정석이었다. 그 반대의 연주는 영혼을 육신에서 우러나오게 했으며, 그 영혼조차도 그 음악에 반해 우리의 육신을 잠시 하늘로 승천시키고 겸손히 음악을 탐구했다. 이것은 매우 진실된 사실이요, 그의 연주는 마법과 접해있는 기묘한 행실이 있다.
또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쇼팽의 곡에 약간의 라흐마니노프의 가루를 첨가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편곡을 했단 소리다. 그 엄청난 저음들은 듣는 이에게 저승의 세계, 즉 이 곡의 본질에 가까운 것을 체험시켜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녹음으로 듣지만, 한 번 울림이 엄청난 홀에서 실제로 이 연주를 듣는다고 상상해 보아라. 그 베이스들에 압도되어 쇼팽의 영혼을 접할 좋은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미련한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것은 미련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쇼팽의 영혼을 찰나로라도 접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는 마법이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마법 그 자체이다. 들어본 사람만 안다. 이것이 얼마나 간단하며 직관적인 말인지 말이다. 아! 그의 연주를 실제로 단 한 번만이라도 들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을는지!
그 역시도 과거의 음악가들 중 하나이다. 현재에 라흐마니노프 같은 음악가가 있는가? 빼어난 현재의 음악가 모두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감히 말하자면 라흐마니노프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요즘은 마법 서적이 사라져서 말이다. 콩쿠르와 발전된 녹음 기술로 인해서.
과거의 별, 근본 있는 음악가. 이들은 영혼의 심장을 다루는 예술가들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안타깝게도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아니할 도리가 비참히 없다. 물론 난 음악이라고는 아직 피아노라는 분야밖에 모르지만, 적어도 이 분야에선 현재의 음악들도 과거와 같이 영혼의 심장을 다루는가?라고 물음을 나에게 던진다면 난 고개를 숙이고 도리도리를 행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음악가들, 정말 잘한다. 아니, 어쩌면 과거의 음악가들보다도 잘할 수도 있다. 왜냐? 테크닉이 좋으니까. 이건 부정할 수 없다. 테크닉은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가 훨씬 좋다는 것은 반박이 불가한 사실이다.
그러나 테크닉은 수단에 불과한다, 수단은 목적을 위한 것이다. 목적이 바로 소리를 통해 우러나오는 음악이요, 그것은 아무리 현재보다 테크닉이 뒤떨어지는 과거라고 할지라도 여태껏 말했듯 과거의 음악이 심장을 강타하는 음악에, 근본 있는 음악에, 그리고 영혼의 심장에 대한 음악에 더 가깝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과거의 영혼들은 매우 순수하고 진실되었다. 음악을 위해서 끝없는 사유를 하였다.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음악의 영혼과 적극적인 소통을 더욱 중시하였다. 그런 위대한 영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는 것, 그리고 현재의 불순물을 씻어내고 과거의 자신이 담긴 음악을 계승하는 것이 우리의 작은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과거는 연연의 길이며, 미래는 미지의 길이지만, 현재는 발전의 길이다. 우리는 아직 발전할 기회가 있다. 그 기회는 무한한 성질이 있다, 음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잡기만 하면 된다. 과거를 발판 삼아, 현재를 더욱 지고에 가깝도록 하는 것이다.
누가 아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진정한 음악가, 영혼의 심장에 대한 음악가를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말할 수 있을지. 그것이 음악이니까.
"난 신비를 창조할 생각이다. 이를 위해 특별한 신전이 필요하다."
- Alexander Skrjab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