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삶이냐

수필 - Human- Animal Bond/건강한 경계/중도와 과유불급

by 김숙진

반려동물 보유 가구가 새로운 가족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펫팸족’, ‘딩펫족’, ‘혼펫족’ 같은 신조어가 우리 곁에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이들부터 아이 대신 반려견을 선택한 맞벌이 부부, 그리고 혼자 사는 삶의 적적함을 온기로 채우는 이들까지 그 모습도 다양하다. 이들은 저마다의 현실적인 이유로 다 채워지지 못한 삶의 욕구를 반려동물이라는 존재를 통해 달래곤 한다. 어쩌면 이들에게 반려동물은 단순히 현실의 결핍을 메워주는 수단을 넘어, 삶을 온전하게 완성해 주는 소중한 가족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사실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어느 국제 심포지엄이었다. 동물을 단순한 유희의 대상이 아닌, 인생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대우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그 시작이었다. 우리가 흔히 쓰던 ‘애완동물’이라는 단어 속의 ‘완(玩)’자에는 사랑한다는 뜻 외에도 희롱하거나 가지고 논다는 의미가 섞여 있다. 자칫 동물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장난감처럼 취급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는 표현이다. 반면 ‘반(伴)’과 ‘려(侶)’는 각각 짝과 동반자를 뜻한다. 이는 동물을 인간보다 낮은 존재가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생의 궤적을 함께 그리는 대등한 존재로 바라보겠다는 약속과도 같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자식들이 장성하기까지 총 네 마리의 견(犬)과 생의 궤적을 함께한 이른바 ‘펫팸족’이었다. 온 가족이 동물을 아꼈지만, 특히 나를 닮아 유독 견을 좋아했던 아들은 동네 반려견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 스타였다. 신기하게도 길에서 마주치는 견들마다 아들을 보면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고, 그 순수한 교감에 마음을 연 견주들은 거리낌 없이 아이에게 반려견을 맡기곤 했다. 덕분에 우리 집은 늘 이웃집 반려견들로 북적이며 활기가 넘쳤다. 이처럼 견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우리 가족의 특별한 사연은 중앙일보에 소개된 것은 물론, KBS 동물 프로그램에 소개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곁을 지키던 반려견이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난 후, 우리 가족은 더 이상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 생명을 끝까지 배웅하며 얻은 깊은 성찰 때문이었다. 사람과 견 사이에는 분명 넘기 힘든 소통의 벽이 존재함에도, 혹여 인간이 동물을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거나 해소하는 도구로만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회의감이 밀려왔다.

특히 개인적으로 마음이 무거웠던 지점은 견을 인격체 그 이상으로 대하며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모습들이었다. 스스로를 견의 ‘엄마’나 ‘아빠’라 칭하며 가족의 위계를 투영하는 방식은,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때때로 내게 낯선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동물을 향한 지극한 사랑은 귀하지만 인간의 언어와 틀 안에 가두기보다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것이 견에게도 더 어울리는 예우가 아닐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 아들이 학업과 일로 바빠지면서 잠시 맡아주던 이웃집 반려견들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뜸해졌다. 아이의 손길을 기다리던 이들과의 인연이 하나둘 정리되고 집안에 고요가 찾아오면서, 우리 가족은 비로소 견과의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한 번은 스무날 가까이 이웃집 견을 봐주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온 견주가 다짜고짜 요구했다. “우리 애 좀 바꿔주세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건가’ 싶어 당혹감을 억누르며 “네? 어떻게 바꿔드릴까요?”라고 되물으니, “전화기를 귀에 좀 대주세요!”라는 간절한 답이 돌아왔다. 시키는 대로 수신기를 견의 귀에 가져다 대려 했지만, 정작 견은 거부하며 도망치기 바빴다. 사람에 대한 예의는 안중에도 없는 무례한 요구라는 생각에 순간 욱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꾹 참고 상황을 전하니 이번엔 걱정이 쏟아졌다. “우리 애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빠 안 찾아요?”라며 오두방정을 떠는데, 내 눈엔 그저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문제는 이런 전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아가며 견을 쫓아다니다 보면 기운은 쏙 빠지고 기분은 묘하게 가라앉곤 했다는 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지인은 반려견 두 마리를 모델로 만들겠다며 학원까지 보내는 열혈 ‘펫팸족’이다. 이미 초.중등 남매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만날 때마다 한 마리는 아기띠로 가슴에 품고, 다른 한 마리는 유모차에 태우고 나타났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 한, 지금 하는 이야기가 금쪽같은 자식의 일인지 반려견의 일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그 지심(至心) 어린 예찬을 듣고 있노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곤 했다.


유명 연예인 커플이 결혼식장에 견을 안고 입장하고, 신혼여행까지 동행하며 실시간 사진을 올리는 모습이 화제가 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이러한 행위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또 다른 억압과 구속은 아닐까. 견의 실존을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동물을 인간의 정서적 도구로만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고기 식문화로 인해 문화적 낙후성을 지탄받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인구의 30%가 견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다.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았던가.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도리어 해가 되는 법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수많은 동물을 접하는 수의사나 전문 훈련사들은 견(犬)을 향해 결코 '아들'이나 '딸', 혹은 '아기'라는 호칭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견주'와 '견'이라는 명확한 명칭을 지키며, 인간의 자리를 동물에게 내어주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는 견을 인간의 감정을 투영하는 의인화(拟人化)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견이 지닌 고유한 물성(物性)을 온전히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적절한 질서를 세워주는 것이 진정한 애정이라는 뜻이다.


견과 인간은 엄연히 다른 종(種)이다. 그 다름을 명확히 인정하되, 우리가 선택한 생명에 대해 최선의 책임을 다하면 그뿐이다. 견을 진정한 반려로 생각한다면 딱 그만큼의 적정한 관심과 애정을 표하는 것이 맞다. 견을 자식과 동일시하며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결국 사람에게 동물처럼 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본연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을 온전히 존중하는 길인 동시에, 세상 모든 생(生)이 각자의 본성에 충실하며 가장 아름답게 공존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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