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하고 중요한 일

by 김모씨



작은 수첩이 있다. 맨 위에 날짜를 쓰고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는다. 수영 강습, 도서관 책 반납, 치과 다녀오기, 우편물 보내기 같은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적는 용도로 쓰인다.

언젠가부터 빠지지 않고 적는 목록이 있다. 글쓰기이다. 한 꼭지의 글을 완성하는 것부터 오전 글쓰기와 밤 글쓰기를 거쳐 퇴고와 단편 소설 이어서 쓰기까지. 매일 조금씩 내용이 달라지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쓰자는 거다.


지난해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주 5일 매일 한 편의 글을 쓰겠다는 호기로운 다짐을 했다.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몇 달간 스스로와의 약속을 잘 지켜나갔다.

올해 들어 주5일 글쓰기의 일상이 무너졌다.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느라 외출이 잦았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글쓰기를 할 에너지도, 시간도 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글쓰기 일과는 점점 생활에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글쓰기를 영 잊고 사는 듯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늘 ‘글을 써야 한다’라는 압박감이 있었다. 나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뭐라도 써야 할 텐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이걸 한다고 칭찬이나 물질적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언젠가부터 글쓰기는 나의 주요한 일과가 되었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할 때 우선순위를 정하는, 잘 알려진 방법이 있다. 모든 일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분류로 나누는 것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시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 시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

이 글을 처음 쓸 때만 해도 글쓰기는 시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적다 보니 글쓰기야말로 그 어느 일보다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라 생각된다.


지지부진. 도대체 무슨 소리를 쓰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이야기의 일부를 손보았다.

어제 읽은 책에서 저자는 주 5일 하루 세 페이지의 분량의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엉망인 글을 고치고 반 페이지 남짓 분량을 덧붙이고 나니 더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절대적인 양이 너무 부족하다.

작성 중인 파일을 저장하고 다시 빈 문서를 열었다. 이제 뭐라도 완성을 해야 할 시간인 거다.


오늘 하루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지만 소용없다. 신문을 뒤적이며 급하게 글감을 찾아 나섰지만 역시 별 성과가 없다.

도대체 무얼 써야 하나 고민하다 빈 문서가 띄워진 노트북 옆에 놓인 작은 수첩에 눈이 갔다.

8월 18일 목요일. 오늘의 날짜 아래 적힌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읽어본다.

수영 강습, 등본 떼기, 치과 서류 찾아오기, 보험 청구 서류 보완, 도서관 반납. 모두 두 줄이 그어져 있다. 완료된 일과들.

다음 목록인 독서에는 세모가 그려져 있다. 잠자기 전에 좀 더 읽어야 한다. 영화 1편. 아무래도 오늘 안에 완료하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적혀있는 ‘글쓰기’.

그렇게 수첩에서 글감을 찾아 빈 문서를 채워가고 있다.

오늘도 글을 한 편 써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언제까지고 글쓰기는 나에게 그런 일일 것이다. 주 5일 성실하게 해야만 하는 시급하고도 아주 중요한 일.

작가의 이전글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