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는 원래 맛이 없었다

주5일 글쓰기

by 김모씨



알코올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부부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전문가가 평소 부부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본 후 문제 해결을 위해 처방하는 프로그램이다.

일상생활에서는 그다지 말이 없던 남편은 술을 마시며 평소 아내에게 할 수 없었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취중진담’이라는 노래와 다르게 술의 힘을 빌리는 감정 표현은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감정이 격해진 남편은 언성을 높이고 부부의 대화는 곧 말다툼으로 변했다. 급기야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남편이 신고 있던 슬리퍼를 움켜쥐고 아내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부부 상담을 진행하던 전문가는 주사(酒邪)는 유전의 문제라는 놀라운 진단을 내리며 절주가 아닌 단주를 할 것을 권했다. 출연자인 남편은 아버지에게 비슷한 문제가 있었음을 밝히며 전문가의 진단을 수긍하는 듯 보였다.

주사를 유발하는 유전자가 있다니, 비슷한 문제를 겪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술에 취하면 아버지처럼 돌변하고 숱하게 많은 실수를 저질러왔으니 말이다.


술이 없는 삶은 무언가 허전한 삶이라 여겼다. 술잔을 비우지 않는 사람, 술을 아예 한잔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술자리에 끼면 맥이 빠졌다. 술을 한잔 한잔 들이키다 보면 어느샌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술기운에 평소라면 못 할 말과 행동을 했다. 평상시 갖지 못한 존재감을 술자리에서 뽐냈다.

말이 없고 낯을 가리면서 남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극도로 두려워하던 내면에는 주목받고 누구보다 나대고(?) 싶은 또 다른 자아가 존재했고 술을 마시기만 하면 모습을 드러냈다.

술자리에서 사람들과의 교제나 대화를 즐겼다기보다는 술자리를 ‘평소에 하지 못한 자기표현을 해소할 기회’쯤으로 여겼다. 목소리가 커지고 대화를 주도하고, 미친 듯이 웃고 엉엉 우는 등 극적인 감정을 표출했다.

모두 평소라면 하지 못할 행동들이다. 목소리가 작고 항상 대화에서 듣는 쪽이 마음 편했다. 남의 눈치를 보며 반응하다 보니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다음날 술기운에 한 행동을 후회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첫 잔을 비우면 이번에야말로 적당히 마시겠다는 결심은 금세 잊혔다.


결코 술이 맛있어서 마신 건 아니었다. 소주의 맛은 절대로 좋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가끔 ‘술이 달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소주는 향부터 목 넘김, 그 후에 찾아오는 쓴맛까지 모두, 화학 화합물과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잔을 비우면 잽싸게 보통 맵고 짜거나 기름진 맛을 가진 안주로 쓴맛을 없애기 바빴다.

나는 그저 술을 마시며 이성의 끈을 놓고 억눌렸던 감정을 한껏 드러내는 일이 좋았다. 그래서 맛도 없는 소주를 연거푸 마셔댔던 거다.


얼마 전 술병이 단단히 났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나 지난밤 내가 먹은 걸 확인하는 정도의 숙취가 아니었다. 몸에 병이 났고 결국은 칼을 대는 시술을 받았다.

금주를 결심했다. 그건 술에 기대지 않고 그때그때 감정 표현하리라는 다짐이기도 하다. 브라운관에서 술기운에야 힘든 마음을 격하게 표현하는 출연자의 모습은 못나 보였다. 그러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와 나를 포함해 알코올 의존증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이 삶에서 술을 완전히 빼버릴 수 있기를. 그 자리에 건강한 습관과 자기표현을 채워나가는 즐거움을 찾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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