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시트콤 보는 걸 좋아했다. 대학생들이 한 집에 모여사는 이야기보다는 가족 시트콤을 특히 더 좋아했다.
<순풍 산부인과>도 그 중 하나다. 박영규는 극중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아내인 박미선의 친정에 빌붙어 사는 캐릭터로 나온다. 박미선은 당시 삼십대 초반의 나름 귀여운 주부로 나오는데, 변변치 않은 남편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친정식구로 부터 남편을 적극 방어하는 캐릭터였다. 둘 사이에 태어난 딸 미달이는 뭐 설명이 필요없는 캐릭터다. 언제나 당당하고 뻔뻔했던 미달이는 요즘 말로 '금쪽이'에 가까운 말썽꾸러기이지만, 자신의 본성을 누르려는 주변 시도에 아랑곳하지 않는 미달이의 강단이 부러운적도 많았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주인공은 바로 박영규였다. 박영규는 초등 동창회에 나가서 동창생 한 명과 썸을 타게 된다. 여자의 반응에 자신감을 얻은 영규는 내심 무언가를 기대하며 단 둘이 만날 약속을 잡는다. 여자를 꼬시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빤한 그는 저녁 식사비, 술값, 택시비, 비상금 등을 철저하게 계산한 후 데이트에 나선다.
그러나 상황이 모두 그의 계획처럼 돌아가지는 않고 예상보다 큰 지출에 영규의 머릿속은 바빠지고 진땀이 흐른다. 여자는 영규에게 모든 것을 맡길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영규는 결국 주머니 사정으로 그녀를 돌려보내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아마도 중학생 시절 본 이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규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연애도, 본능도 돈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것 같다.
갑자기 20년도 지난 시트콤의 에피소드가 떠오른 이유는 따로 있다. 어제 친구와 50만원 때문에 대판 싸웠다. 나는 돈에 상당히 연연하는 스타일이다. 돈에 연연한다는 것은 이런거다. 매일의 지출을 정리하며 한숨을 푹푹 쉬고, 늘 하고 싶은 일,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길 때마다 돈에 제약을 받는다(고 느낀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경제적으로 여유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돈 앞에서는 체면도 없이 쪼잔해지며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 적지 않다.
어느 정도 오해를 풀고 친구와 대화를 이어가다가 돈에 관한 나의 '쪼잔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너는 돈에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음. 없이 살아서 그런가봐."
"나도 없이 살았어. 없이 살았다고 다 그러진 않아."
그렇다. 뭐 살아가면서 한번쯤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더욱이 풍요나 빈곤의 개념은 지극히 주관적이니 말이다.
어쩌면 돈에 대한 집착은 꽤 오랜기간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오며 더욱 공고해진 것도 같다. 나는 빚지는 느낌을 싫어한다. 자기가 쓰는 돈은 자기가 벌어야한다고 믿고 있지만 10년이 넘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지금도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겠다는 목표로 이것저것 하고 있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일까 싶은 의심과 언제든 다시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사는 처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머릿속을 굴리느라 본능을 누를 수 밖에 없던 박영규처럼, 나도 50만원 때문에 관계를 그르칠 뻔했다. 돈에 덜 연연하고 살고 싶다. 열심히 돈 벌고 즐겁게 쓰면서 살고 싶다.
'돈', '돈' 하며 살지 않는 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