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회피하는 건 아주 오래된 습관이자 버릇이다. 기억 속의 가장 오래된 회피 장면은 20여 년 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 인터넷과 가정용 PC가 보급되던 때였고 우리 집 안방에도 텔레비전 옆자리에 새로 들인 컴퓨터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언젠가 친하던 무리에서 오해가 생겨 사이가 틀어진 적이 있었다. 꽤 억울한 입장이었던 나는 무리 중 그나마 이성적이고 호의적인 친구의 메일 주소를 알아내 나의 상황과 솔직한 마음을 길게 적어 메일을 보냈다.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에 망설이다 막상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얼마간 마음이 편해졌던 것도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친구의 답장이 새 편지함에 도착한 걸 확인하자 심장이 쿵쿵댔다. 편지를 받고 며칠인가 답장의 제목만 확인하고 열어보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났다. 친구의 마음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망설이다 결국엔 편지함에서 열어보지도 않은 메일을 삭제해버렸다. 언젠가 다시 열어볼 여지를 없애기 위해 휴지통도 말끔히 비워버렸다. 친구의 마음이 무엇이 되었든, 나는 그걸 대면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상황을 대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버릇은 오래 지속되었다. 메일이야 열어보지 않고 지우는 게 가능하지만, 메신저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때는 안에 적힌 내용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서둘러 대화를 넘기거나 아예 대화창을 없애는 식으로 상황을 비했다. 이 버릇은 아주 최근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요즘엔 ‘조용한 채팅방’ 기능을 이용해 대화방에서 나가지 않고도 상황을 회피할 수 있었다. (심지어 ‘조용한 채팅방’을 숨기는 기능도 있었다.)
일상에서 사람을 대면하면서도 나는 갖가지 방법으로 상황을 회피한다. 가장 자주 쓰는 방법은 상황을 못 본 척 다른 곳을 보고 들려도 안 들리는 척 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동안, 티가 나게 딴 짓을 하거나 옆 친구를 훼방하는 친구가 있을 때 그 장면만 오려낸 듯이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며 계속 수업을 진행하는 식이다.
이렇듯 매사에 불편한 상황을 회피만 하며 살다보면 살아도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작용이 생긴다. 거기에 더해 이번에도 대면하지 못하고 숨고 말았다는 무능함으로 뭘 해도 찜찜함만 남아 이럴 바엔 세상을 등진 채, 방구석 혼자만의 세상에서 사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회의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오늘 오전 회피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마음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부재하는 동안, 대하기 어렵고 어색한 대표님과 둘이 수업을 진행하게 된 것이었다.
지난 주말 주문을 외우듯 친구를 따라 입 밖으로 내뱉은 다짐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때보다 마음이 편했고 어색함도 조금 덜했다.
수업 시간에 맞춰 아이들과 인솔 교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예전 같으면, 시선을 회피하기 급급했을 텐데 용기를 내어 그들을 맞았다. 손이 서툴고 수업의 흐름에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도 안 보이는 척 하는 대신 다가가서 가만히 바라보다 필요한 도움을 주고 말을 건네 보았다.
나의 역할은 미미했을지언정, 수업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모두가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정리를 마친 대표님도 자리를 비우고 홀로 남았다. 정말 오랜만에 무언가를 마치고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나에겐 버거울 때가 있다. 주어진 역할을 하는 당연한 것에서부터 예상에 벗어난 상황을 마주하는 것, 불편한 상황이나 부담스러운 감정을 대면해야 하는 일까지, 일상에서 숨고만 싶어지는 순간이 여러 번이다. 그런 장면을 마주보지 못하고 피하며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지는 게 가능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여태 인생을 허송세월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상황이든 피하지 않고 마주보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더라도 도망가지 않기. 상처만 남을지라도 어색한 감정과 불편한 상황도 겪어보리라 다짐해본다. 과연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