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모씨 Jan 11. 2024

어제 한 '노동'

‘노동(勞動): 몸이나 머리를 써서 일하는 것.’ 

아이의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명료하게 한 줄로 적혀있다.

 

‘노동(勞動): 몸을 움직여 일을 함.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다. 몸만 있고 ‘머리’는 없는 데다 ‘물자를 얻기 위해서’라니. 물자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노동이 아니란 말인가. 괜한 반발심이 든다. <보리 국어사전>을 더 애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노동’에 대한 나의 정의도 사실, 후자에 속한다. 노동='임금을 받고 하는 일'이라 여겼다. 글을 쓰고 책이나 영화를 본 후 정리하는 일, 가사 노동과 육아, 누군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드는 품과 같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은 나의 기준에 의하면 노동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임금이 책정되지 않는 나머지 모든 일을 그저 취미 생활이나 여가 활동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 나에게 글쓰기와 각종 돌봄은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만 하는 일이 아니며 기분전환이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것도 아니다. 누가 정해주지 않았지만, 책임과 임무로 여기며 오랜 기간 그 일을 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써왔다.

 

 내가 하는 이 수고와 노력은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임금을 받아야 노동이라는 믿음은 언제, 누구로부터 이식된 것인지도 궁금했다. 임금 외의 다른 기준을 세워볼 수는 없나 고민하던 차에 어제 내가 한 일들을 다양한 기준으로 나누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금전적 대가 여부, 가치 정도, 마음 상태 등으로 어제 한 일(노동)을 돌아보려한다. 

 

1. 임금과 무임금

 

임금을 받고 하는 일: 오전에 사무실에서 문서 작성 업무를 했다. 정부 보조금을 받은 사업의 최종 보고서 격인 문서였다. 행사 일지를 쓰고 알맞은 사진을 첨부해 서류의 빈칸을 채우는 일을 했다. 

센터에서 아이들 저녁 준비를 하는 일은 올해 시작하게 된 임금 노동이다. 저녁 메뉴로 간장 소스 닭볶음과 순대볶음을 만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엔 뒷정리와 설거지를 했다.

 

무임금으로 한 일: 글 한 편을 썼다.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져 쓰는 도중 서너 번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문서 작성과 돌봄을 마친 후엔 어김없이 자리로 돌아와 이어서 썼고 오전에 시작한 글을 늦은 오후에 마무리지었다. 

아이의 독서와 영어 공부, 문제집 풀이 과정을 지도했다. 함께 자리를 지키며 아이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게 노력했다. 아이가 읽는 영어 문장을 교정해주었으며 아이와 타협해 공부량을 정했다. 

마을 학교 학생이자 이웃집 아이의 영어 공부도 봐주었다. 암기한 단어를 확인해주고 교재 설명 및 풀이를 함께 했다. 

자기 전에는 읽은 책을 블로그에 정리했다. 나에겐 좀 어려운 내용이라 소감 등 글을 따로 쓰진 못하고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 적었다.

 

2. 가치와 무가치

가치 있는 일: 글 한 편 쓰기. 현재 나에게 의미가 가장 큰 일을 오늘도 완수했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 몇 권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세 권의 책을 번갈아 가며 읽었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은 문장이 좋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다 읽은 후 정리하는 글을 한 편 쓰리라 마음먹었다.

아이와 독서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책을 읽는 중간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어제는 문득 ‘엄마가 왜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며 입을 열었다.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그때 뭐라고 대답했냐 물었더니, '어느 날부턴가 엄마가 말이 나오지 않아서 말하기를 연습하려고 독서 모임에 나가다가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한 내용을 아이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무가치한 일: 오전에 입력한 서류의 완성본을 확인했다. 내가 작성한 부분은 일부에 불과했다. 각종 증빙 자료가 첨부된 서류는 단행본으로 엮을 만큼 두툼했다. 정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서류를 요구하는구나, 하는 놀라움과 함께 ‘대한민국. 문제 많다 문제 많어.’라는 탄식이 이어 나왔다. 그만큼 서류의 양이 나의 기준에는 지나치게 많아보였다.

 

3. 즐거움과 따분함

즐거움: 역시 글쓰기이다. 글을 쓰는 동안은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시간이 뭉텅이로 지나간 느낌이 든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한 후에는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아쉬움보다는 ‘오늘도 썼다’라는 안도감이 더 크다. 이렇게 꾸준히 쓰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를 두고 재미도 느끼는 일이다. 

가치와 즐거움은 함께인 건가. 독서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올해엔 관심사를 조금 더 파고드는 독서를 하기로 했다. 페미니즘과 정상성의 의미, 돌봄 등이 요즘 나의 관심사이다.

 

따분함: 널어놓은 빨래를 개어 정리하는 일. 다시 빨래를 건조대에 거는 일. 이런 과정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가계부를 정리하고 보험 등 납부일에 맞추어 계좌 정리를 하는 일. 가계부를 정리할 때마다 느끼는 미스터리. 도대체 번 돈은 어디로 간거지? 

통신사 상담원에게 약정 해지와 통신사 변경을 문의하는 일. 솔직히 무엇을 묻고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따분함을 넘어서 자신의 무능함을 굳이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적고 보니, 참 많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어제 못지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은 무용하다고, 노동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살았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임금을 받는 노동에 더불어 가치 있고 즐거우며 나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다양한 ‘노동’을 하고 있다. 여러모로 쓸모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고 무용한 삶을 살고 있지도 않다.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될 순 없다. 절대로. 

작가의 이전글 농촌 유학의 (의외의) 장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