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일기
전업주부라는 본분을 잊고 산 지 오래다. 가족 식생활을 책임지는 것은 전업주부에게 주요 업무이다. 매일 거기서 거기인 음식을 차려냈다. 돌아보면 맛 보다는 생존을 위한 식생활이었다. 요리 실력은 시간이 지나도 발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후퇴하고 있었다. ‘제철 식재료로 정성껏 만든 요리를 누군가 먹이는 일’은 즐거움이 아닌 힘든 노동일뿐이었다. 그것도 매일 해야만 하는.
작년 시간제 일자리에서 일하게 되면서 반찬가게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온 반찬을 접시에 옮겨 담고 국이나 볶음요리는 불에 데우기만 하면 되니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교육비 때문에 맞벌이를 시작하는 주부들이 많다는데 나는 ‘밥 짓기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삼시세끼 반찬가게에서 사먹기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계약 기간이 끝나고 다시 전업주부로 돌아왔지만 반찬가게 이용을 멈추는 건 쉽지 않았다. 가계부 사정을 봐가며 반찬가게와 장보기를 적당하게 섞어 밥상을 차려냈다.
몇 개월이 지나고 아파트 상가에 하나둘 밀키트 전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글쓰기 수업을 등록하고 동네 서점에 단골이 된 시점이었다. 마트 가서 장보고, 식사 준비 할 시간에 책 읽고 글 쓰며 보내고 싶었다. 가격도 괜찮은 편이어서 밀키트 상점을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엄마, 배고파. 밥 줘.”하고 말하면 그제야 귀찮은 몸을 일으켜 세워 저녁을 사러 나갔다. 내일 아침 먹을 것까지 여유 있게 한 손 가득 음식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어느 날인가 늦게 퇴근한 남편이 출출하다며 냉장고를 열었다. 제일 먼저 남편의 눈에 띈 것은 밀키트 재료와 반찬가게에서 사온 밑반찬들이었다. 정작 남편은 별 말 없었지만 나는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고 들통 난 심정이었다.
다시 본분을 찾겠다고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넷 장보기로 각종 채소와 식재료를 배달 시켰다. 다음날 배송된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었다. 날짜가 지난 재료와 반찬들 정리도 함께했다. 본격적으로 요리는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지쳐갔다. 저녁은 시금치나물과 장조림으로 메뉴를 정하고 메추리알을 삶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서 평소 좋아하지만 챙겨보지 못했던 TV 프로그램인 ‘방구석 1열’을 틀어놓고 삶은 메추리알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소고기도 삶아졌다. 장조림용으로 결을 따라 찢기 시작하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예전에 엄마는 수월하게 고기를 찢어 옆에 있는 내 잎에 쏙쏙 넣어줬던 것 같은데 말이다.
‘뭐가 잘못된 거지?’
고기는 뜨거워 손으로 잡고 있기 힘든데 생각처럼 잘 뜯어지지도 않고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양손에 집게를 들고 삶아진 고기를 ‘잡아 뜯기’ 시작했다. 충분히 삶아지지 않았는지 삶은 양지살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나는 분노에 휩싸여 욕을 하기 시작했다.
조리대가 엉망이 되고, 욕을 한껏 지껄이고 나서야 장조림 만들 고기가 준비되었다. 물과 간장, 설탕 등을 눈대중으로 넣고 메추리알과 고기를 넣고 삶았다. 드디어 완성된 장조림을 반찬통에 옮겨 담았다. 요리는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던데. 가족의 안녕과 건강을 바라는 마음은커녕, 분노와 좌절 같은 온갖 부정적인 에너지가 응축된 장조림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했다. 오랜만에 마음먹고 만든 장조림을 별 반응 없이 먹는 남편과 아이를 보며 멸치 볶음, 진미채 볶음, 콩나물, 어묵볶음처럼 이제 장조림도 반찬가게에서 사먹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