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함 없이 ‘인생 책’을 소개하는 이들이 있다. 읽기 전과 후의 삶이 완전히 바뀐 전환점이나 평생을 품고 살아갈 만한 신념을 책 속에서 찾았다니 신기하고 부러운 일이다. 언젠가 대형 헌책방에서 책을 처방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에 무심코 신청 버튼을 눌렀다. 본인의 인생 책 다섯 권을 적어야 하는 항목에서 망설이다 결국 신청하지 못했다.
가장 처음 읽은 벽돌 책(분량이 많은 책)을 떠올렸다가 완독에만 의미가 있을 뿐 딱히 남은 기억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오열하면서 읽은 책을 헤아려보니 너무 많았다. 누가 누가 나를 더 울렸나 따져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명인사나 주변인들이 인생 책으로 꼽는 고전을 읽어 봐도 감동은 있었지만 내 삶에 큰 변화는 없었다. 인생 책 좀 없으면 뭐 어떤가. 앞으로 삶의 전환점이 될 책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기로 했다.
그렇게 ‘인생 책의 부재(?)’를 받아들이며 지내던 어느 날, 책장 한구석에 꽂혀있는 책에 눈길이 갔다.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니까, 내가 서른여섯 때 울다가 웃으며 읽었던 그 책은 정아은 작가의 <엄마의 독서>였다. 엄마이면서 ‘엄마’가 붙은 모든 것을 거부하던 날들이 있었다. 아이에게 ‘엄마’ 냄새를 맡게 해주어야 하며, 출산하고 3년 동안은 ‘엄마’이외의 다른 욕망을 버리라 말하는 책들. ‘엄마’의 행복까지 좋은 양육의 조건이자 강요로 느껴져 이런 책들은 읽고 나면 더 큰 우울감이 덮쳐왔다.
<엄마의 독서>는 ‘엄마’가 붙은 다른 책들과 달랐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내’가 잘 살기 위한 책 읽기를 말하고 있었다. 나와 다르지 않은 작가의 육아 고민과 좌충우돌하는 일상을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 육아의 과정에서 오는 좌절과 커다란 물음표로 지쳐갈 때 저자는 ‘책’이라는 동아줄을 붙잡고 버텨나갔다. 그가 읽은 책 목록이 너무나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 출근하듯 서점을 찾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는 저자의 일상이 생경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시간 키보드를 두드리며 소설을 쓰다니, 저자와 나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저자를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던 걸까? 나는 저자가 읽었다는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보고 통쾌함을 느꼈고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전율했다. <엄마됨을 후회함>을 집어들며 제목만 보고도 후련해졌고 <팬티를 바르게 개는 법>을 읽고 아이에게 집안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좋은 엄마가 되고자 육아서를 탐독했다. 책장을 덮고 나서는 좋은 엄마는커녕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울함만 더해갔다. 우울해서 아이에게 화내고, 그런 내가 싫어서 괴로워하던 밤을 보내다 운명처럼 <엄마의 독서>를 만났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하루아침에 모든 답답함과 울분이 풀릴 리는 없다. 그 후로도 계속 우울했고 자신을 비난함에 변함없었다.
그래도 삶에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다. 세상의 불합리함과 내 안의 욕망을 돌아보며 나를 더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육아서 외에 다른 분야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엄마의 독서>를 만나고 3년이 지났다. 책 읽기에 적지 않은 재미를 찾았고 저자 정아은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육아와 살림을 서둘러 마치고 무언가를 쓰고 있다. 제목에 붙은 ‘엄마’라는 말에 누군가 내가 그랬듯이 편견을 갖건 말건 <엄마의 독서>는 내 인생 책이다. 그가 쓴 연작 소설 두 권이 궁금해졌다. 어서 읽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