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강의를 듣다가 인간사회의 ‘통과의례’ 문화에 귀가 솔깃했다. 예를 들자면 조직 생활. 조직에 입단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들. 많은 성장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강사는 철학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일종의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 강사가 농담처럼 건넨 말에 학생들이 웃었다. 이 관문을 통과하고 맞는 세계가 ‘행’일지 ‘불행’일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 뼈 있는 농담으로 들렸다.
철학 수업을 듣는 것, 독서, 글쓰기를 합한 모든 것이 일종의 통과의례라면, 과연 무엇을 위한 과정일지 궁금해진다. 최근 읽은 책 <자기결정>과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저자는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글쓰기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있나? 글쓰기 전과 후, 나는 뭐가 달라졌을까? 나는 왜 글을 쓰고 있을까?
독서도 비슷한 물음을 남긴다. 어떤 책을 읽기 전과 후,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그 변화는 긍정적인 변화일까?
철학을 취미 삼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이런 일련의 정적인 행동들로 나는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까?
답은 없고 질문만 이어진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책과 글쓰기, 철학을 통해서 나는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그리고 그건 궁극적으로 ‘나’로 살기 위한 마음이다. 나는 나답게 살지 못할 때가 많다. ‘나’다운게 뭔지 잘 모르므로.
이런 질문과 생각들은 사춘기, 늦어도 이십 대에는 해봤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십 대를 걸쳐서 사십 대가 이르는 나이가 될 때까지 별생각 없이 살았다. 살아지는 데로 살았고 남들의 삶을 참고하며 살았다.
조금 (많이) 늦게 통과의례를 겪고 있다. 나를 포함한 세계를 이해하고 적당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거듭나기. 이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면 강사의 농담처럼 행복이 기다릴지, 불행이 기다릴지 알 수 없다. 살아지는 데로 사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존재하리라.
그래도 일단 읽고, 쓰고, 강의를 듣는다.
이렇게 오늘도 한 편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