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1박 2일, 그리고 돌아오는 길
밤이 깊었다. 거실에는 시어머님과 나, 둘만 남아 있었다. 남편은 먼저 방으로 들어가 쉬고 있었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시어머님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많은 것을 견뎌온 손이었다.
시어머님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결혼을 몇 번 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갖고 산다고, 버림받는 아픔도 알고, 버리는 아픔도 안다고.
본인도 그랬다고 했다. 삶이란 것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그러니 나의 과거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그 상처를 딛고 다시 사랑할 용기를 낸 것이 대단하다고.
딸처럼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시어머님은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아들과 잘 지내달라고, 본인은 정말 행복하다고.
아들이 50이 다 되도록 결혼을 안 하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이제 혼자 늙어가나 했는데, 이렇게 예쁜 며느리가, 그
것도 소중한 생명을 품고 왔다는 게 꿈만 같다고. 너무 기쁘다고.
그날 밤 잠들 때 행복했다. 진짜 행복이었다. 불완전하지만, 상처투성이지만,
그래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시어머님은 교회에 가셨다. 남편과 단둘이 집 주변을 산책했다.
작은 마당에는 텃밭이 있었고, 배추, 각종 허브 등 정성껏 가꾼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남편이 어렸을 때 이 마당에서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유년의 기억, 어머니의 사랑, 이 작은 집에 깃든 시간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남자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가 이렇게 따뜻한 사람인지, 왜 끈질기게 나를 기다려주었는지.
남편이 갑자기 멈춰 서서 나를 안았다. 조심스럽게, 배를 피해서. 그리고 속삭였다.
나를 만나서 행운이라고. 정말 행복하다고.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라고.
그 순간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행복했다. 분명히 행복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나는 행복해도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어제 밤 시어머님의 말씀, 지금 남편의 고백, 이 모든 따뜻함과 사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일까.
과거가 떠올랐다. 실패한 결혼, 무너진 사업, 쌓인 빚, 정신과 약에 의존하던 나날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망가뜨렸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그런 내가 지금 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남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 아래 깔린 불안을 숨겼다. 이것이 언젠가 깨질 것 같은 예감을.
오후에 시어머님이 교회에서 돌아오셨다.
점심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새 떠날 시간이 되었다.
시어머님이 싸준 반찬 보따리를 들고 차에 올랐다.
어머님이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라고, 자주 연락하라고, 또 오라고.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차가 출발했다. 백미러로 작아지는 시어머님의 모습을 봤다.
가슴이 뭉클했다. 좋은 분이었다. 진심으로 우리를 환대해주신 분이었다.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님이 얼마나 좋으셨는지, 음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집이 얼마나 포근했는지. 작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 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녁 8시쯤 집에 도착했다. 긴 여정이었다. 몸이 피곤했다.
남편이 짐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은 어두웠지만 따뜻했다. 우리의 공간이었다.
눈을 감으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알림이었다.
귀찮았지만 확인했다. 발신자는 건강보험공단이었다.
문자를 열었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달 말일까지 원복된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으면 귀하의 계좌를 전부 압류 조치하겠습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순간 숨이 막혔다. 손에서 핸드폰이 떨렸다.
기억이 돌아왔다. 과거, 사업을 하던 시절. 대표였다. 작은 사업체였지만 내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사업은 잘 안 됐다. 점점 기울었고, 결국 문을 닫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무너졌다.
우울증이 심해졌고, 집에 칩거했고, 세상과 단절했다.
그 시간 동안 급여가 책정되어 있었다. 실제로 받지도 않는 급여.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존재하는 급여. 그것을 기준으로 건강보험료가 계속 부과되었고,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았지만 회피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알았다. 너무 많이 쌓인 후에. 그제야 무보수 대표 신청을 넣었다.
처리가 되었다. 이제는 보험료가 정상적으로 책정되었다. 하지만 과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할인받았던 보험료를, 제대로 내지 않았던 보험료를, 전부 토해내라는 것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의 행복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시어머님의 따뜻한 말씀, 남편의 고백, 포근했던 1박 2일, 그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현실이 돌아왔다.
나는 빚쟁이였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꿈꾸지만, 과거가 발목을 잡는 사람이었다.
행복해도 될 자격이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답을 알았다. 없었다. 여전히 없었다.
나는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과거의 빚이, 실패가, 잘못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남편은 옆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말해야 할까. 말하면 그는 실망할까.
아니, 실망보다는 걱정을 할 것이다. 어떻게든 해결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 빚이었다. 내가 만든 문제였다. 그에게까지 짐을 지울 수 없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조용히.
방금 전까지 느꼈던 행복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모래처럼, 물처럼.
1박 2일이 끝났다.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꿈은 깨고, 현실은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과거와 싸우는 중이었다. 새로운 시작은 아직 멀었다.
행복할 자격, 그것은 여전히 내게 없었다.
-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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