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다고 할 것인가

ep.6 혼란형 인간이 안정형 인간을 만나

by bella

단약 7주차, 나는 처음으로 내 안의 괴물을 명확하게 마주했다.

그것은 불안이라는 이름의 검은 짐승이었고, 6년 동안 약물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가 이제야

풀려난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리고 그 짐승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남편이었다.


새벽 6시, 남편이 침대에서 일어나 운동복을 입었다.

화요일이었으니 러닝을 혼자 뛰는 날이었다.

남편은 몇 달 전부터 규칙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월 수 금은 수영, 화 목 은 아침 러닝을 뛰었다.

이유는 명확하고 누가 들으면 팔불출 소리가 나오는 말이었다.

평생 늙지 않고 나라는 사람에게 계속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일것이며

오래토록 건강하게 껌딱지처럼 붙어 추하게 늙지 않고 부지런한 모습으로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태어날 아이를 키우려면 체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집에 들어오면 땀에 젖은 얼굴로 샤워를 하고, 아침에 늘 나를 보며 예쁘다 사랑스럽다 해 주고

나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런데 나는 충격적이게도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남편이 현관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응시했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난 주 어느 아침, 편의점에 들렸을 때 본 여자가 떠올랐다.

젊고, 날씬했고, 화사했고, 하얗고 심지어 노출이 있는 운동복을 입고 주변을 서성였다.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남편이 그녀를 만나러 가는것은 아닐까?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를 못했다. 가지를 뻗듯 자라났다.

남편이 러닝을 하다가 그여자와 마주치고, 눈이 마주치고, 말을 걸고, 번호를 교환하고,

몰래 만나기 시작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증거는 없었다.

단 하나의 근거도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그것은 이미 사실이 되어 있었다.


수영도 마찬가지였다.

수영장은 거의 벗은 몸으로 헤엄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남편이 다른 여자를 보고, 시선을 주고받고, 어쩌면 라커룸에서

우연을 가장해 말을 걸 수도 있었다.

상상은 통제할 수 없이 팽창했다.

남편이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나와 아이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어느날 갑자기 짐을 싸서 나가는 모습까지.


약을 먹을 때는 이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더라도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은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가지를 뻗고, 잎을 펼쳤다.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가 되어 내 머릿속을 온통 뒤덮었다.


이내 남편이 땀에 젖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들어와 말했다. 잘 잤냐고.

나는 대답대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언가 다른 점은 없는 지, 숨기는 것은 없는지.

남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실제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어도, 내겐 모든 일이 벌어진 후였다.


난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단약 후 무너진 것은 단순히 신체 기능만이 아니었다.

정신의 구조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믿는 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모든것이 흔들렸다.


남편이 저녁밥을 차리는 솔리가 이내 들려왔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만 골라 요리했다.

남편이 밥을 먹으며 설레이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오늘 수영장에서 기초 훈련조차 안됐던 발차기가 가능해졌다고 기분이 좋다고

웃으며 말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코치가 여자면 어떡하지.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날카롭고 차가운 말.

수영장에 여자도 많냐는 질문. 남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남편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왜 자꾸이러냐고, 자기를 왜 못 믿냐고, 뭘 어떻게 더 해줘야 하는지

너무 서럽고 슬프다고 헀다. 그 목소리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무너졌다. 남편의 눈에서 상처를 보았다. 내가 준 상처.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내가 상처를 앞으로 줄 사람이라고 단정짓고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고 나는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또한번 안아주었다. 괜찮다고 다 자기눈에는 예쁘다고

하지만 이 순간에도 역겨운 나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왜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닐까?

정말로 바람을 피우고 있어서, 그것을 숨기기 위해 더 잘해주는건 아닐까

생각은 끝이 없었다.


밤마다 깨어있으면서 남편의 숨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이고 평온한 그의 호흡은

부러우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이렇게 편안할 수 있지, 혹시 숨기는게 없어서 마음이 편한게 아니라

너무 능숙하게 숨기고 있어서 편한 건 아닐까.


애착 유형에 대해 어떤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안정형, 불안형, 회피형, 그리고 가장 복잡한 혼란형.

나는 혼란형이었다.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두려워하고,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안정을 갈구하면서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유형.

가장 치료하기 어렵다는, 가장 관계를 망가뜨리기 쉬운 유형.


남편은 안정형이었다. 일관되고, 믿을 수 있고, 예측 가능한 사람.

약을 먹을 때는 나도 안정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약이 사라진 지금, 본래의 내가 드러났다.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한, 통제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조차 믿지 못하는 나를 마주했다.


혼란형 인간과 안정형 인간의 만남. 한 사람은 끝없이 확신을 주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끊임없이 의심한다.

한 사람은 사랑을 증명하려 애쓰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증명을 믿지 못한다.

그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단약의 증상인지, 임신 호르몬의 장난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내 안에 있던 어둠인지.

어쩌면 세가지 모두였을 것이다.

약이 사라지고, 호르몬이 요동치고, 그속에서 본래의 나,

가장 취약하고 불안한 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남편은 여전히 매일 아침 운동을 나갔고, 집에 들어와 밥을 차려주었고,

나를 안아주며 평생 사랑한다고 말했다.

변함없는 사람. 한결같은 사람.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의심했고, 두려워했고, 믿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를 좁히는 법을, 나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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