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의 기억 톺아보기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12년 K-컬처 트렌드는 단연 슈퍼스타 K를 필두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음악에 재능이 있지만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흙 속에 묻혀있다 빛을 보게 해주는 아주 좋은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 좋은 취지의 방송 포맷이 기업 채용 프로그램에 도입되고 있었다. 내가 이 회사를 입사할 때도 ‘디자인 캠프’라는 디자이너 서바이벌(?) 채용 프로그램을 통해 입사를 할 수 있었다.
때는 대학원 졸업을 앞둔 2012년 중순, 취업준비를 할 때다. 올해를 넘기면 서울에서 지낼 곳 이 없기에(대학원 때문에 서울로 오리온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 중이었다),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서 강사 활동을 해야겠다고 나름 목표를 세우고 올해까지 꼭 취업을 하겠노라 호기롭게 계획을 세웠다. 지금은 정말 대기업 디자이너 신입 채용 공고가 귀하지만, 그 당시에는 UX의 붐이 시작되던 때라 거의 모든 기업에서 새로운 신규 채용이 일정한 텀을 두고 오픈되었다.
여느 취준생들처럼 독취사 카페를 가입하고 채용 정보를 얻어 기숙사 책상 캘린더에 지원할 디자인 회사를 하나씩 표시하였다. 가장 마지막에 표시했던 것이 바로 11월에 있던 L사 디자인캠프 프로그램이다. 여기는 채용 과정이 다른 공고들 보다 정말 너무 복잡했다. 다른 회사들은 포폴 제출 후 인적성, 1차 면접, 2차 면접 채용이었는데, 여기는 무슨 1차 포트폴리오를 내고, 2차 인적성검사 후 실기시험, 3차 1차 면접, 1차 피티,, 4차 디자인 캠프 합숙, 2차 피티, 5차 인턴 후 채용되는 무려 5개의 단계를 2개월 동안 거쳐야 하는 아주 복잡한 단계의 채용 프로세스였다.
'아.. 니들이 무슨 엠넷이냐고...'
승부내기가 싫어서 운동도 안 좋아하고,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도 안 좋아했는데, 무슨 디자이너 채용하는데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 싶어서
‘제발… 저긴 안 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그 당시 내 생각이었다.
‘캘린더의 마지막에 표시된 11월 달력이 넘어가기 전엔 취업하지 않을까.....?’
그렇게 연초부터 불나는 취업도전이 시작되었다. 정말 많은 회사에 디자인 포지션에 지원을 했다. 결론은 3월 S사 최종면접에서 떨어진 이후, 어느 곳에서도 나를 관심을 보이는 회사가 없었다. 아 나는 정말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운명일까?, 시간은 얼마나 정직한지 달력은 계속 넘어가고 어느덧 11월, L사의 디자인캠프에 지원해야 할 마지막 운명에 놓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정말 내 생각이었다. 정말 여기까지 오고 싶진 않았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다. 1차 관문은 포트폴리오 접수다. 지금이야 대부분 디지털 파일인 pdf로 접수를 받는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인쇄된 실물 포트폴리오 접수를 하는 회사들도 꽤 있었다. L사도 그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pdf보단 종이로 인쇄된 포트폴리오가 좋다. 운이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대학원 디자인센터에 친하게 지내던 분이 있어 그분의 도움(지금 생각해보면 귀인이었다)을 받아 접수 1일 전날 고퀄리티 종이로 출력을 하여 포트폴리오를 정말 멋지게 제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았던지, 첫 관문인 포트폴리오가 패스되었고, 나도 드디어 인적성검사라는 걸 치게 되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인적성검사(3월에 보았던 S사면 접은 특수 전형이라 인적성이 면제되는 프로그램이었어서 인적성은 처음이었다)에 광화문 교보문고를 달려갔다. 예전에 한쪽 벽 가득 기업들 채용 관련 책이 가득 쌓여있던 장면이 생각났다. 역시 우리나라는 뭐든 고시에 아주 최적화되어있다.‘L사 way’라는 주제의 책이 아주 절찬리에 판매 중이었다.
그 책으로 1주일 정도를 미친 듯이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러 서울 끝에 위치한 L사로 왔다. 아주 구석에 있었는데, 그때는 너무 긴장한 탓에 그곳이 그렇게 외진 곳인지 몰랐다. 그 건물로 이사온지가 얼마 안 돼서 비교적 새 건물이었고, 뭐 어쨌든 가고 싶은 회사기도 했으니 콩깍지가 써져있었다. 지하철 게이트처럼 생긴 곳에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신기했고, 다들 메고 있는 사원증에서 광채가 났던 것 같다. 임시카드를 부여받고 카드를 찍고 들어갔는데 게이트 앞에 엄청 큰 플래카드에는 ‘반드시 일등 합시다’라는 구호가 적혀있었다. '뭐지 스스로 이등임을 알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L사 way시험을 치러 1에 대강당으로 향했다.
와 이 무슨 디자이너가 되려고 하는 건지, 선생님이 되려고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출제의도… 국어, 수학, 상식 뭐 이런 문제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제시간 내 다 못 풀면 그냥 두어야 한다, 아무거나 다 찍어야 된다 뭐 이런 의견이 분분했던 것 같은데 나는 애라 모르겠다 하고 마지막엔 전부 다 찍어서 제출했다. 그리고 지금의 MBTI 같은 인성검사는 정말 지금 생각해도 왜 해야 하나 싶다. 나는 L사와 맞는 인재에 빙의하여 최대한 인재상에 맞추어 체크해야 돼서 끝에 즈음 가면 내가 누구고 여긴 어디고 이런 생각이 그냥 든다. 나중에 회사에 입사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 인적성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기도 한다고 하고, 이 시험 자체가 엄청 비싼 툴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과연 여기서 견딜 수 있는 사람인가 성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오전에 인적성검사를 치고, 오후에는 실기시험을 치러 갔다. 과제를 주고, 3시간 내 디자인을 하고, 그 디자인 결과물에 대한 내용을 프레젠테이션으로 만들어서 제출하는 것 까지가 실시시험의 과정이었다. 그때는 L사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글로벌 컨설팅회사의 오판으로 스마트폰으로 약간 늦게 갈아타면서 온갖 질타를 다 받고 있던 시절이라 나는 모바일 앱을 제안하는 미션이었다. 기억이 확실하게 나진 않지만 지금 보면 정말 다 찢어버리고 싶을 디자인을 했던 것 같은데, 키노트로 인해 내가 평소 관심사였던 프레젠테이션으로 잘 만들어서 냈던 기억이다. 그것이 주효했던지 디자인이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운 좋게 또 인적성 & 실기시험을 통과하였고 1주일 정도 뒤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 때 준비해 간 프레젠테이션의 동영상이 재생되지 않는 위기가 있었지만, 여차 여차 잘 넘기고, 어떻게 2박 3일의 디자인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다.
코로나 상황의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인데, 강남에 있었던 L사 디자인 분소에서 2박 3일 동안 30여 명의 예비 디자이너들에게 개인별로 디자인 과제를 풀도록 한다. 밤을 지새우는 것도 가능하고, 밤이 되면 집으로 가서 자고 오는 것도 가능했다.
개인적으로는 각양각색의 예비 디자이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대학원생 신분의 디자이너들을 주로 보아왔는데, 나보다 몇 살 어린 친구들이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내고 접근하는 과정들을 2박 3일간 직접 보니 나름 신선한 추억이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도 동기들을 만나면 그때의 짧은 순간 벌어졌던 일들이 회자되곤 한다. 모두가 간절하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 다들 선명한가 보다.
나는 스마트 TV의 홈 화면을 UX/UI를 제안하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 그때 관리하던 페이스북 커뮤니티를 통해 설문조사도 하고, 결과물을 도출했고, 다행히 4번째 관문도 통과할 수 있었다.
디자인 캠프에 발을 담그는 순간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연초에는 꼭 피해 가고 싶었던 채용 프로그램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나에겐 이 프로그램은 기회가 되었다. 사실 다른 디자인 회사들은 서류면접을 통해 1차로 선발된 사람에 한해서만 포트폴리오를 낼 기회를 주는 회사가 많았다.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으나 학부 스펙이 디자인 전공이 아니고, 지방 대학교 출신, 번번한 영어점수도 없던 나는 포트폴리오를 낼 기회조차 없었고, 번번이 낙방했다. 그런데 L사는 먼저 포트폴리오로 사람을 뽑고, 또 그 포트폴리오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3일 동안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을 모두 보고 디자이너를 채용했다. 정말 어떻게 보면 슈퍼스타 K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포맷이 잘 반영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렇게 디자인 캠프 이후 디자인센터에서의 2주간의 짧은 인턴기간을 마치고, 나는 그다음 해인 2013년 1월 20일 정식으로 L사 디자인경영센터에 신입 그래픽 디자이너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