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인지 너무나 지루했던 6주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끝내고 드디어 현업에 배치되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디자인센터에서 스마트 텔레비전의 GUI를 디자인하는 팀에 배치되었다. 지금은 플렉시블 근무제라 자유롭게 출근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이 국 룰이던 시절이었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던 신입이었지만 내가 하나 이기지 못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잠'이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출근을 했는데도 특히 점심을 먹고 나면 왜 이렇게 졸린 것인지 잠이 미친 듯이 쏟아지던 때가 있었다.
졸고 있는 나를 스스로 발견할 때 벌떡 일어나서 탕비실에 비치된 정수기의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정신을 차릴 때도 있었지만 현재의 잠과 타협하여 '에라 모르겠다'를 남발할 때도 있었다. 현재의 잠과 타협하는 방법은 이렇다. 27인치 대형 모니터를 벽으로 두고 디자인할 때 쓰라고 나눠준 대형 노트를 활짝 편다. 그리고 턱을 괸 상태로 볼펜으로 무언가 그리는 척하며 잠든다. 중간중간 깨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려진 그림을 감상한다. 대체 가장 정신이 멀쩡해야 할 그 시기, 나는 왜 이렇게 잠을 못 이긴 것일까? 신입 디자이너가 졸린 이유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첫 번째 - 너무 긴장했기 때문에, 너무 피곤할 것이다 (?)
신입사원은 출근과 동시에 긴장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하는 게 별로 없지만, 레이더를 활짝 펴고 어디서 나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어디서 어떻게 쓰임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과도한 레이더 관리는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너무 피곤하게 만들고, 특히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는 더욱더 심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내 첫 번째 (말도 안 되는) 추측이다
두 번째 - 단순 반복 노동이 많을 것이다 (?)
신입 디자이너에게 무슨 중대한 일을 맡길 수 있겠나? 그래서 신입 디자이너들에겐 단순한 업무 노동이 주어진다. 내가 신입 때 맡은 일 중 하나는 텔레비전에 방송되는 프로그램들의 썸네일 이미지를 받을 수 없을 때 디폴트로 뜨는 이미지들을 찾고, 각각의 이미지들을 3개의 비율의 해상도로 만드는 일이 있었다. 문제는 찾아서 매칭 해야 하는 이미지가 700장이 넘었다. (3개의 비율로 일일이 다 잘라야 하니 결론적으로 2,100개의 파일이 생성해야 됨) 처음에는 신입의 패기로 뭔가 포토샵 매크로를 활용하면 좋지 않을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일일이 수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때 나는 게*이미지의 거의 모든 이미지를 다 본 것 같다. 스크롤이 곤욕이었고, 괜찮은 이미지를 선별하고, 컨펌받고, 컨펌받은 이미지들을 일일이 잘라내고 저장했다. 창의성보다는 단순 노동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무의식의 흐름에서 작업할 때가 많았다.
내가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는지 뇌에서 내 눈을 거치지 않고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이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게 자율주행인가?) 어쨌든 무의식 속에 작업을 모두 완료했고 최종 적용을 위해 개발자한테 파일들을 모두 전달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메일에 보니 난리가 났다. 파일이 누락된 게 많고, 결정적으로 파일명의 이름이 제각각이라 도무지 쓸 수 없다는 개발자의 피드백이었다. 그날 나는 당연히 사수한테 혼이 났다. 휴먼에러는 있을 수 있지만, 대체 왜 생성된 파일을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메일을 보냈냐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세 번째 - 사수에 의지 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이 될 무렵 나는 홀로 작은 소프트웨어 GUI를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 맡아본 일이었고, 유관부서와의 협의가 필요하여 사수(프로젝트 리더)와 함께 처음으로 개발자들이 모여있는 다른 로케이션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때가 하필이면 오후 4시즘 이었다.. 회의실에 앉아서 협의가 막 시작되고 개발자들이 개발된 화면을 공유해주고 향후 발생될 이슈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그 설명이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기적을 경험하며 나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쳤나 봐... 뭐지... 왜 이렇게 졸리냐 아오... 사수님이 날 안 봤겠지?'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별일 없이 사수님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집으로 헤어졌다. 집에서 푹 자고 일어나 다음날 출근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수님의 호출이 있었다.
"요즘 많이 바빠?" 사수님이 물었다.
"(해맑게) 아뇨, 그럭저럭 지낼만한데요?"
"아.. 그래?? 근데 너 어제 회의시간에 졸더라? 그건 좀 아니잖아? 긴장 좀 하자"
순간 어제의 회의가 떠올랐다.
나는 왜 그 순간 졸았을까? 진짜 긴장이 풀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사수님이라는 큰 방패 같은 존재가 너무 든든하여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졌음에 틀림없다.
회사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나도 프로젝트를 리딩 하게 되면서 나는 회사에서 잠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프로젝트 때문에 전날 아무리 늦게 자고, 엄청 일찍 출근해도 회의시간이고, 업무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자는 일이 사라졌다. 업무에 대한 책임감일 수도 있지만, 언제든 누군가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긴장을 항상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한동안 우리 팀 막내가 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졸았다. 내가 실제로 본적은 별로 없지만, 희한하게 다른 팀에서 제보를 많이 해준다.
'아 그래서 예전에 선배들이 나를 그렇게 뭐라고 했구나...'
그래도 나는 그 막내에게 말해주었다.
"긴장해서 그렇지? 잠 오면 그냥 나한테 말하고 밑에 수면실에서 좀 자고 와도 괜찮아!"
그리고 그 뒤론 그 막내가 업무시간에 존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