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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의 시간 Feb 19. 2024

슬픔의 방문 / 장일호

한국에서 부쳤던 책들이 한 달이 지나 드디어 싱가포르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반가운 책들 사이에서 '슬픔의 방문'이 눈에 띄었다. 작년에 읽었던 책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이 책이었다.

모처럼의 휴식시간이지만 내게는 그리 휴식할 시간이 없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특히나 아이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싫지는 않지만 고요하게 책을 읽는 시간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아이가 할머니와 놀 때, 아이가 아빠랑 놀 때 그럴 때 잠깐씩 책을 읽는다. 잠깐이지만 책을 읽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나는 대개는 사람보다 책이 더 좋다. 책과의 관계 속에서 더 충만함을 느낀다.

연휴 기간 동안 틈틈이 읽고 있는 이 책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책의 저자도 '책 팔아서 버는 돈이 생긴다면 책 사는데 쓸 것이다.'라고 할 만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삶에서 슬픔의 시간이 찾아올 때면 책을 통해 그 시간들을 이겨낸 사람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많은 책들이 인용되어 있고 덕분에 나도 좋은 책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느끼기에 일단 저자가 기자여서 그런지 글의 문장력이 뛰어나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고민이 느껴지고 힘이 느껴진다. 두 번째 이유는 솔직함이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개인의 가정사를 드러낸다. 아버지의 자살, 엄마의 낮은 학력과 고된 노동, 비정규직 남동생, 가난한 친척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드러내면서 저자는 자기 자신의 슬픔의 민낯에 조금 더 다가가게 되고 독자 역시 그 슬픔을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셋째는 그가 견뎌온 삶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경이로움이다. 슬픔의 시간들을 견디면서 계속 삶의 길을 걸어 나가는 그의 인생 자체에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내 안의 어떤 슬픔들은 아직도 내 인생에 들어와서 똬리를 틀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도 극복하고 싶다는 마음, 나도 이겨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이 저자의 책을 보며 나도 이겨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좋았던 문장 몇 가지를 여기에 적어본다. 


- '아버지의 부재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있음' 역시 나는 김애란의 소설을 통해 극복했다. 나는 엄마가 김애란 소설 속 '모'처럼 단단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냥 또 다른 엄마를 발명하면 어떨까 싶었다. 어떤 아이에게는 '두 명의 엄마'가 필요한 법이다. 엄마를 내가 선택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실재하는 엄마의 빈 부분을 메워 줄 가상의 엄마가 필요했다. [달려라, 아비]나 [칼자국] 속의 엄마 같은. - p.21


-수많은 '엄마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박탈당한 기회를 생각한다.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엄마 또래의 교수나 전문직 여성을 만날 때면 늘 처음처럼 신기했다. 자라는 동안 주변에서 그런 직업의 사람을 본 적 없는 탓이었다.-p.27


-한 사람의 독서 목록이야말로 그 사람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p.31


-세월호 이야기를 하염없이 나눴다. 그 수치스러운 봄을 함께 견디고, 또 한 해를 견디며 앞으로의 수많은 밤을 약속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p.34


-비혼이야말로 나를 지키며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일정 부분 여전히 그렇게 믿는다.- p.35


-나는 사랑을 '어떤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지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p.36


-서울 각지에서 이 학교로 모여든 아이들은 대개 고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출한 남동생을 찾기 위해 조퇴하는 날이면 정임은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은 몸으로 뒤늦게 등교했다. 학칙은 아르바이트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소영은 매일 하교 후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불판을 닦았다. 근무 중 왼손 손가락 대부분이 잘린 세진의 아버지는 직업병을 앓았고, 동생이 셋이나 있는 윤주의 엄마는 알코올의존증 환자였다. 우리는 우리의 구만리 같다는 앞길이 너무 캄캄해서 겁이 났다.- p.49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으면 좋겠다. -p.54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p.69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p.91


-우리는 여자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p.134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좋은 시댁을,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걸 '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싸워서 얻어 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싸울 수 있었던 건 동료 여성들 덕분이라는 걸 이지 않으려 한다. "'결혼'이 '착취'의 동의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수신지, [노땡큐:며느라기 코멘터리] 인용)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열고 있다. -p.153 


마음이 아픈 날에 이 책이 위로가 될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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