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매해 12월이 되면 '올해의 시리즈' 놀이를 한다.
서로에게 '올해의 기쁨', '올해의 음악'과 같은 질문을 하는데 이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한 해를 되돌아보게 해 준다.
1. 올해의 기쁨
싱가포르라는 나라에서 살게 된 것이 올해의 기쁨인 것 같다.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한국에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내 나라인만큼 언어나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이 있다.
2. 올해의 후회
건강을 잘 챙기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특히나 2주 전 출장에서 무리를 한 탓에 이번주 정말 아팠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후폭풍이 오는 몸인 것 같아 후회가 된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아진 점은 이제라도 조금씩 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점, 그리고 정신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3. 올해의 슬픔
다행인 걸까. 올해에는 슬픔의 감정이 짙지 않다.
물론 근원적인 슬픔은 있다. 자본으로부터 혹은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점.
4. 올해의 순간
아무도 읽지 않고, 소설합평 수업에서 비평만 잔뜩 들은 소설이지만
어쨌거나 첫 소설을 온라인으로 퍼블리시했다는 것.
소설을 쓰면서 그동안 내 삶에서의 힘들었던 마디마디들을 조금은 덜어낸 느낌이랄까.
내가 나를 위로하면서 쓴 글이었다 생각한다. 그래서 글을 쓰며 나도 치유를 받았다.
5. 올해의 식사
남편 생일에 갔던 이탈리안 식당에서의 식사가 참 좋았다.
음악이며, 인테리어며, 서빙하는 분의 세련된 응대기술이며, 음식이며, 심지어 그릇까지.
그리고 올해 나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린 상황에서도 묵묵하게 곁을 지켜준 남편의 생일이어서 그것도 좋았던 것 같다.
6. 올해의 인물
내 매니저가 나의 올해의 인물이다. 그녀의 따뜻하면서도 강한 리더십에 나는 정말 반하고 말았다.
그녀와 일하며 많이 배웠고 나도 좀 더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7. 올해의 책
올해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일과 육아, 집안일의 무한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틈틈이(예를 들면 아이가 세이펜으로 책을 읽을 때라던지, 아이가 유치원에 갔는데 운 좋게 나는 쉬는 날이라던지 등) 책을 읽었고 그때마다 정말이지 행복감을 느꼈다. 나는 책이 너무 좋다......
11월에 있었던 한국 출장은 너무나도 버거운 일정으로 나를 힘들게 했었다. 첫날 광화문 부근에서 고객 미팅이 끝났을 때 내게는 다음 일정까지 약 한 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점심을 먹을지 교보문고를 갈지를 선택해야 했다. 둘 다 하기에는 일정이 빠듯했다. 나는 내가 배가 고픈지 마음이 허기진 것인지 생각하다가 마음을 채우고 싶어 교보문고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이라는 책을 만났다.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소설에 가까운 다소 짧은 소설이었고 출장 기간 내내 틈날 때마다 읽으면 다 읽을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에 가볍게 구매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일정은 너무 빡빡하여 잠들기 전에만 틈틈이 읽을 수 있었는데 정말이지 너무 재미있어서 오는 잠을 물리쳐가며 읽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싱가포르로 돌아가는 밤비행기, 싱가포르 집에 도착한 날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읽는 내내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읽었고 작품이 주는 메시지 역시 몽글몽글함이 있었다. 읽으면서 '와 진짜 잘 쓴다.'라며 혼자 감탄하며 읽었던 책이다. 소설을 읽은 지 한 주가 지났지만 그 몽글몽글함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이렇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남아있는 그런 소설을 나도 써보고 싶다.
8. 올해의 투자
올해에는 투자에 너무 무관심했다. 싱가포르에서 번 돈 중 여유자금들을 그냥 은행계좌에 넣어두었다.
이제라도 S&P에라도 넣어야겠다. 그나마 지난 4년간 유지해 오던 대출을 청산한 것은 그래도 마음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
9. 올해의 음악
피아니스트 중에 조성진을 정말 좋아한다.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 순간순간에 음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가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종종 노동하는 나에게 연민을 느끼는데 그럴 때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면 위안을 느낀다. 특히나 그가 연주한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2는 단연 올해의 음악이라 할 만하다. 우울증을 겪던 라흐마니노프가 아마도 이 곡을 만들면서 병을 극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음악을 들으면 인간 삶의 고독과 절망, 비극이 극 초반에 절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나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 역시 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다.
10. 올해의 가장 비싼 소비
나는 원래도 명품을 많이 사는 편이 아니고 몇 년에 한 번 백을 구매하는 정도이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나는 셀린느를 골랐다. 올해도 백을 하나 사야지 싶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고르기 쉽지 않았다. 나는 피비 파일로의 올드셀린느를 좋아하는 편이고 에디 슬리먼의 뉴셀린느에는 조금은 거부감이 있다. 올드셀린느 특유의 절제된 심플함이 좋은데, 뉴셀린느는 그런 올드셀린느만의 매력이 모두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백에는 셀린느의 금장 로고가 있어 과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에도 셀린느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유는 피비 파일로가 새로 론칭한 브랜드는 가격 부담이 너무 크고, 셀린느와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브랜드들도 대개는 역시 과하기 때문이다. 과함이 요새의 트렌드인지?... 그래서 셀린느의 제품 중 올드셀린느의 느낌이 나는 백을 고르게 되었다. 이 백이 아무래도 내게는 올해의 가장 비싼 소비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