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혼란
아이덴티티 (identity)라는 말은 보통 '정체성'이라는 말로 번역되며 '한 사람이나 무리를 특정할 수 있는 자질, 신념, 성격 특성, 외모 및/또는 표현 (위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러한 정의에서 나타나듯, 정체성은 한 집단에 대한 용어로도 사용되기에 한 그룹이 가지고 있는 동질성을 나타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말하는 MZ나 제가 젊어서 들었던 X나 Z 세대 같은 용어들 역시 그 무리가 가지고 있는 동질성을 나타내는 경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용어가 동질성을 나타내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질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한 사회에서 세대 간의 차이를 표현하고 나와 남이 다름을 나타내는데 더 자주 사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 한 사람이 속해있는 무리(예: 인종, 종교, 국적)가 점점 더 많아지고 넓어지고 복잡해지면서, 많은 그룹의 정체성들을 한 개인이 가지게 되어, 그 개인의 정체성은 더 복잡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개인이 속한 무리가 많아질수록 나와 완전히 똑같은 무리'들'에 속해있는 사람은 작아지기 때문에, 현대인이 더 외롭워 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로서 아이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장점이 있다면 더 늘려주고 싶고, 단점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가려주고 싶고, 재능이 없는 부분은 메꾸어 주고 재능이 있는 다른 분야로 이끌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했습니다. 재미 삼아 그리고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본 것을 아이에게 시험해 본 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읽은 바에 의하면 어린아이가 손에 장난감을 쥐고 있을 때, 그것보다 더 좋은 장난감을 줘도 아이는 그 새로운 장난감을 쥐지 못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는 손에 쥔 것을 놓아야 새로운 것을 집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본능(?, 저는 이것이 본능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철이 들어야 할 나이가 훨씬 지났음에도 저는 아직도 눈에 보이는 자그마한 이익에 집착하기도 하고,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한 경우에도 선택하지 못한 작은 것이 아직도 눈에 밟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약한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때문에 더 좋은 장난감도 받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단지 소수의 똑똑한 아이들만이 손에 쥐고 있는 장난감을 버리고 더 좋은 새 장난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 아이가 똑똑한지가 궁금해서 이런 실험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아이와 다른 환경에서 지내면서 아이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뿐만 아니라 아이가 운동 코치로 자원해서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유대관계를 갖고 어떻게 플레이는 하는지에서 아이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고, 아이들과 같이 가라데를 배우면서 아이들의 또 다른 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아무리 자식에게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도 아이의 정체성 문제는 또 하나의 피할 수 없는 허들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전글에서 말씀을 드렸듯, 전 집에서 학교 공부를 가르치지도 않았고, 공부를 하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매주 토요일 오후 한 시부터 한 시간은 무조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잃지 않도록, 칭찬만을 하면서 가르치려고 노력을 했고, 그 시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글을 배우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각인을 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제가 언어란 문화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가지고 있고, 또한 제가 아이들이 자라는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면, 아이에게 온전히 한걸음을 걸어서 부모쪽으로 오라는 강압을 하는 대신, 아이와 제가 서로 반걸음씩 나아가서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에 그랬습니다. 또는 서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한글을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면 제가 알고 있는 많은 한국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글 책도 읽게 시켰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한국사람으로 자라길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미국 사람이나, 캐나다 사람으로 자랄지언정,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진 아이로 커나가길 희망한 것입니다. 여기 식으로 말하면 "A Canadian with Korean heritage ('한국인의 전통을 이해하는 캐나다인'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네요)"로 키우려로 노력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하더라도 아이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막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태어나서 자라는 한인 초등학생들에게 "너의 피부색은 무엇이니?"라고 물어보면 (제 아이들을 포함해서) 모든 학생들이 "백인"이라고 대답하더군요 (제가 살았던 동네가 백인 동네라서 이런 대답을 들었을 겁니다. 만약 다른 곳이었다면 다른 피부색을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거울을 보고 매일 부모의 동양인다운 얼굴을 보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자신이 동양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당연히 다른 캐나디안 아이와 같은 (동질성을 가진)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아이들도 이 정체성이 더 복잡해지고, 친구들도 갈리게 됩니다. 순간 외톨이가 되는 것이지요. 제가 건너서 아는 한 친구는 고등학교까지 모든 친구가 백인이었는데, 대학에서 이 백인 친구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서 한인 학생들과 어울리려 했지만, 결국 부족한 한국어와 문화의 몰이해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모범생으로 늘 칭찬을 받고 공부도 잘해서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너무 늦게 격은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제 아이에게 초등학교 저학년때에 그 질문을 했을 때, 제 아이도 자신이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이라고 얘기하더군요. 저희도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아니 넌 아빠 엄마와 똑같이 황인종이야"라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동양인이고, 남과 피부색도 문화도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미국 사람이지만 남과는 조금 다르고, 모든 사람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두 아이다 조금씩 정체성에 혼란 격기도 했지만, 크지 않은 어려움을 느끼면 잘 극복했습니다.
이제는 머리가 다 커버린 아이들이 가끔 저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때는 한글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그때는 억지로 집에서 한국어로만 얘기하게 하는 아빠 엄마가 싫었다고, 그리고 너무 엄해 보이고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아빠가 싫었다고.... 그리고 또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고, 아빠와 엄마가 그렇게 가르쳐 주어서, 한국에 있는 친척들과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고 whitewashed Asian (스스로가 아시아인임을 싫어하고, 백인처럼 행동하는 아시아인)이 안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아이를 낳으면 엄마 아빠처럼 가정교육을 시키고 키우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제가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인 듯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감사한 마음만 듭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완벽한 아빠도 아니고 최고의 아빠도 아닐 수 있지만, 아는바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요. 그리고 잘 커주어서 고맙다고요.
독자님의 아이들은 어떤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나요? 부모와의 정체성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계시는지요? 오늘의 제 얘기가 소중한 독자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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