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 놓인 골짜기갤러리
이우환미술관 맞은편에 자리한 밸리갤러리는 규모가 크지 않아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둘러보기 좋다. 폐관 시간이 오후 4시로 주변 미술관 중 가장 이르니 주의하자. 베네세뮤지엄 표로 이곳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이름 그대로 골짜기(밸리)에 위치한 이 갤러리는 2022년 3월에 개관한, 꽤 신입 공간이다. 낙엽을 밟으며 들어서니 한 켠에 조그마한 부처상 여럿이 밭의 작물처럼 심겨 있다.
오자와 츠요시의 <슬래그 불상 88/Slag Buddha 88>은 이름 그대로 제철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인 슬래그로 만든 88개의 불상이다. 왜 하필이면 88개인가 했더니 시코쿠 지역(일본을 이루는 네 개의 섬 중 하나로 다카마쓰가 있다. 나오시마는 지리적으로는 혼슈와 더 가깝지만 행정구역 상 시코쿠 소속이다)의 사찰 88개를 돌아보는 순례인 오헨로를 염두에 둔 모양이다. 나리타 미나코의 만화 <꽃보다도 꽃처럼> 15권에서 한 등장인물이 젊은 나이에 사고로 사망한 친구를 생각하며 오헨로를 떠나는 장면이 꽤 자세히 다뤄진다. (https://series.naver.com/comic/detail.series?productNo=6428238)
정말 88개인가, 불상의 수를 세어보는 잠깐의 순간이 오랜 시간을 들여 시코쿠 전역의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여정의 축약본 정도 되려나. 산업폐기물 불법 투기로 자연이 오염되었던 지역에서 그 폐기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다니. 심지어 그것이 기원의 대상인 불상이라니. 이런저런 상념을 이고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탈바꿈한 불상들을 지나면 물가에 둥둥 떠다니는 은색공들이 보인다.
저게 뭐지 생각하며 골짜기 깊숙이 더 나아간다.
설명 없이도 안도 타다오 솜씨임이 틀림없는 작은 건축물이 보인다. 작은 사원을 의도했다고 하는 이 공간은 부분 부분 트여있어 실내와 실외의 구분이 애매하다. 이곳에도 무심히 놓여있는 은색 공들은 쿠사마 야요이의 <나르키소스 정원 Narcissus Garden>이라는 이름의 작품이다.
그런데 왜 나르키소스지?라는 의문문이 완성되기도 전, 공 앞에 쪼그려 앉아 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아하...!
공 앞에 서니 모든 공에 내 모습이 담긴다. 나도 모르게 <가시나무> 노래를 흥얼거린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나로 가득한 은색공들을 등지고 돌아 나온다. 나(들)로 가득한 세상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불상들의 뒷모습은 조용하다. 모든 여행이 순례는 아닐 테지만 이 여행에는 떠나본 적 없는 순례길을 닮은 순간이 종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