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로 푹푹 찌던 작년 여름이었다. 여느 날처럼 재택근무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후, 쉽게 저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노을 햇살을 받으며 동네 숲 산책을 하고 있다가 길고양이들을 마주쳤다. 다들 더위에 배고픔에 굶주리고 걸을 힘도 없어 보이는 처량한 모습, 불과 코앞에서 그런 고양이들을 가만히 빤히 보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오셨다.
"학생, 여기 울타리 넘어도 되는 거예요?"
나이 삼십대 중반에 학생 소리를 듣다니, 기쁜 마음을 살며시 감추고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알고 보니 그곳엔 다른 고양이 무리가 더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그들을 찾아 나서기 위해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는 것. 당연히 난 관리인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다는 내 작은 손사래를 뒤로하고 성큼성큼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봤다. 여기저기에 고양이 밥을 놔두고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산책길로 안전하게 돌아오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고양이들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아주머니는 굶주림과 목마름에서 구원해주는 천사이고, 나는 맨날 눈인사만 하지 그 흔한 참치캔 하나 안 사다 주는 매정한 사람.
사실 필자는 고양이를 참 좋아한다. 특히 고양이는 사람에게 해가 되는 벌레나 소형 동물들을 잡아주기 때문에, 전 세계 어디서나 환영받고 예쁨 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개(늑대)는 가끔 사람을 공격하는 습성이 있지만, 고양이는 그런 것도 없다.
쥐와 바퀴벌레도 잘 잡아주고, 애교도 많고, 화장실도 잘 가리며(애완동물로써 최대의 장점), 게다가 산책을 시켜줄 필요도 없고, 풀어놓으면 알아서 잘 놀다가 밥 먹다가 애교 부리다가 어느새 자고 있다. 예로부터 인간이 고양이와 함께 살아오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좋다고 해서 생태계에도 좋을까? 그러니깐, 인간=생태계 라는 공식이 성립하는지 여부이다. 인간은 만물이 영장이니 인간이 곧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아무리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 근본적인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고양이는 인간에게 해가 되는 소형동물만 잡는 게 아니라, 해가 되지 않는 소형동물들도 사냥한다. 그리고 사냥을 '엄청나게' 잘한다. 평생을 집에서 나고 자란 고양이들도 반응속도와 순발력은 엄청나며, 타고난 피지컬은 소형동물들에게는 공포와 지옥 그 자체다. 요즘은 산에 가도 멧비둘기 같은 텃새들을 보기 쉽지 않다.
자연에 있는 소형동물들, 특히 조류들은 야생 고양잇과 동물들에 의해 개체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소형동물들이 줄어들면 그들의 세계에서 먹이로 삼는 야생 벌레의 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레를 굉장히 싫어한다. 고양이가 잡아주는 벌레보다, 새들이 놓아주는 벌레가 더 많아질 수도 있다.
또한 고양이 세계에서도 엄연한 규칙이 있다. 대부분의 고양이는 독립적으로 혼자 생활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중시하는 동물답게 서로 영역 싸움이 치열하다. 원래라면 영역 싸움에서 패배한 고양이는 그곳을 떠나는 게 이치이다. 하지만 인간이 개입해서 패배한 고양이들을 돌본다면, 힘내서 승리한 고양이 입장에선 원치 않게 다른 고양이와 계속 같은 영역을 공유하게 되는 불쾌감을 느낀다. 이것은 곧 스트레스로 연결이 된다.
또한 고양이는 새끼를 한꺼번에 많이 낳고, 돌봄 환경을 감안하여 야생에서 생존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약한 새끼는 포기하는 습성이 있다. 괜히 어설프게 생존해서 영역 확보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굶어 죽어갈 바에얀 지금 보내주는 것이 새끼들을 위해 더 나은 선택과 집중이라고 생각하는 것. 안타깝지만 그것 또한 고양이 세계의 법칙이며, 자연적인 개체수 조절, 즉, 생태계 평형이다.
이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가끔 버려진 새끼를 치료하여 기르며, 그중에선 분명 중성화에 실패한 개체수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렇게 야생 개체수는 점점 더 늘어간다. 인간의 손으로 개체수를 늘리고, 또다시 인간의 손으로 중성화를 해야만 하는 아이러니.
물론 야생 고양이들의 먹을거리를 챙겨주는 사람들도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어차피 영역 동물이라 이래나 저래나 평생 우리 곁에서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고, 밥을 주지 않는다면 도시에 쓰레기들은 모조리 뒤지고 다녀서 길거리를 오염시킬게 뻔하니깐.
게다가 그들은 세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사비로 야생 고양이들을 돌본다! 마트에서 내가 먹을 것도 동원참치가 싼 지, 사조참치가 싼 지 그램당 가격을 보고 앉아있는 나의 입장에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인류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다만, 야생 고양이는 생태계의 일원이며, 함부로 그들의 세계에 '정책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위험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그들은 개체수가 적은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종도 아니다.
그저 귀엽다는 이유로 야생 고양이를 돌본다면, 멧돼지 새끼들도 귀여우니깐 그래야 할 것이다. 고라니도, 다람쥐도, 청설모도, 족제비도, 너구리도, 오소리도, 토끼도... 모든 야생 동물의 새끼들에게 밥을 다 줘야 한다. (만약에 비둘기가 귀여웠으면 큰일 날뻔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당장에 농작물이 초토화될 테니깐.
야생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것은 집안에 들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키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굶주려서 지쳐서 죽어가는 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고 선의를 베푼다는 뿌듯함은 분명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중성화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개체수는 늘어간다.
오늘도 우리 집 앞에 터를 잡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도망가지도 않고 나를 보며 처량하게 울어댄다. 밥을 달라는 건지 물을 사달라는 건지 몸이 아프다는 건지 해석은 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선뜻 손을 내밀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만의 규칙이 있겠지.
고양이들이 우리 인간의 정치 이념이나 윤리와 법률에 관해서 논하지 않듯이, 인간도 고양이 세계의 규칙에 대해 함부로 뭐라고 할 수 없다. 내가 그들을 보살핌으로 인해서 잠재적으로 늘어날 개체수에 대해 중성화를 함부로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애써 그들의 눈빛을 외면해본다.
다만, 올 겨울을 잘 버틸 수 있기를, 행운을 바라며.
-부기.
아무것도 안 해준 집 앞 고양이에게 내심 미안해서 사진도 찍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