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이사 준비를 하던 지난 여름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온갖 주상복합 건물로 둘러싸인 역세권 흔한 동네 어느 빌딩 1층에 자리한 부동산 문을 톡톡 두드리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저 빌라 찾으러 왔는데요 혹시 매물 있을까요?"
"아, 죄송해요. 저희 빌라 취급은 안 해요."
"네. 수고하세요."
부동산 문을 닫고 나는 길을 나섰다. 그런데 걷다 보니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썩 유쾌하지 않은 찜찜한 기분. 나는 '취급'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봤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생각한다. 그때의 분위기, 표정, 뉘앙스로 짐작해볼 때 부동산에서 했던 말 중간에 분명 숨겨진 단어가 있을 거라고. 이렇게.
"죄송한데, 저희 빌라 (따위는) 취급 안 해요."
소형차를 몰면 가끔씩 서글퍼질 때가 있다. 도로 주행이나 주차장에서 종종 겪게 되는 일. 양보나 배려 따위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아서 괜찮지만, 바로 불공평을 겪을 때이다.
모든 주차장들이 그렇지만 주차 자리도 급이 나뉘게 된다. 출입구랑 가깝고 통행하기에 편한 꿀자리가 있는가 하면, 저 외진 구석탱이 자리도 있다. 물론 정기 주차라서 주차 요금은 같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는데 하루건 이틀이건 일주일이건 계속 세워놔도 문제는 없다. 그러려고 있는 게 주차장이니깐.
가끔씩 '꿀자리'에 하루 이틀 주차를 해놓으면 전화가 온다.
"죄송해요. 저희 일이 있어서 그런데, 차 좀 다른데 옮겨 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다고 하고 차를 옮겨준다. 신기하게 내가 꿀자리에 주차를 하면 꼭 '일'이 생기나 보다. 벤x 비엠x 테x라 같은 차들이 자리를 맡고 있으면 일주일째 미동도 없어도 별일 없다. 주차장에 나도 모르는 무슨 원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원칙이 소형차들에게만 유독 가혹하다는 것쯤은 안다.
사실 인류사에서 인류가 평등하게 살았던 적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드라마 추노에서 말했듯이 세상 일이라는 건, 양반이 상놈이 되고 상놈이 양반이 되는 일의 반복일 뿐이라고.
그 옛날, 명목상의 신분제 폐지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계급은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다. 감히 어딜 천한 것들이랑 같이 살아갈 수 있냐며. 물론 이건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21세기 신분제는 아직도 공고하다.
아파트 사는 사람은 빌라 거지라고 놀려대고, 브랜드 아파트 사는 사람은 또 그 안에서 아파트 계급을 나누고, 또 그 안에서 매매가 얼마로 들어왔는지를 가지고 급을 나눠댄다. 급급급매로 시세보다 몇억 싸게 들어온 사람 입주 막아야 되는 거 아니냐며. 무책임하게 남의 재산 깎아먹은 사람이라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고등학교 어디 나왔는지, 수시로 왔는지 정시로 왔는지를 두고 또 나눈다. 채용을 위한 이력서에는 꼭 출신지를 적는 칸이 있다. 아직도 이게 왜 필요한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왜? OO도 태생이면 뽑고 OO도면 안 뽑게?
요즘 젊은이들 비난하는 글들이 참 많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프라x 구x 루이x톤 명품에 환장한다고 비난하고, 월급도 쥐꼬리만한데 벤x 아우x 타고 다니는 카푸어라고 욕하고, 브랜드 아파트 살겠다고 영끌하는 것을 또 비난한다.
"나 때는 말이야. 단칸방에서 신혼생활 시작해서 육남매 기르고 그랬어."
"요즘 젊은이들 미래 생각도 없이 돈이나 펑펑 쓰고 말이야. 여행이나 다니고 말이야."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파토리다. 젊은 사람들이 흥청망청 돈 써서 국가 재정 위기가 왔다고, 분명히 1997년 겨울 그때 그랬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소형차 타고 다니면 무시하고 대형 SUV 타고 다녀야 인정해 주는 세상, 빌라 살면 욕하고 아파트 살아야 인정하는 세상, 명품 브랜드 입고 다녀야 사람대접해주는 세상, 겉모습 옷차림으로 사람 판단해서 계급 나누는 세상, 그러면서도 사치를 비난하는 모순적인 세상은 어디에서 왔을까. 과연 일부 집단만의 문제일 뿐일까.
바로 작년 2021년에, 지금이라고, 빚내서 집 사라고, 벼락거지 신세되기 싫으면 당장 대출받아서 아파트 사야 한다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영끌로 밀어 넣은 사람들이 원하던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