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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포레스트 Jun 30. 2022

책_나인

어느 날,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좋은 기회로 창비에서 진행하는 소설Y클럽에 당첨되어 천선란 작가님의 나인이라는 책을 대본집으로 먼저 읽게 되었다. 이미 천 개의 파랑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천선란 작가님의 차기작으로, 원래 SF류의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나인을 시작으로 소설 자체의 재미를 다시금 알게 되었다. 나인이라는 소설은 흡입력이 굉장히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책에 줄을 긋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인데 이 대본집은 누구에게 팔거나 하는 용이 아니라 오롯이 나의 소장용으로 받은 거라 성인 이후 처음으로 책에 줄을 치며 읽어보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마음을 울리는 말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어진 줄들이 계속 늘어났다. 또, 책을 굉장히 천천히 읽는 편인데 다음 장이 궁금해서 자꾸만 밤을 새웠다. 마지막으로 달려갈 땐 아침 7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할 정도로 좋았던 책이다. 


줄거리를 요약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생각과 말들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책은 "어느 날,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을 시작으로 다양한 사건들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사람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내가 식물인간이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식물이기에 해결할 수 있는 일들과 마주한 사건들까지 말이다. 

초입부는 인물들의 소개로 구성되었다. 그렇기에 몰입도가 중요하기보다는 초반에 

차근차근 캐릭터 빌딩을 해나가는 과정이었다. 



행복은 살아가는 도중에 느끼는 잠깐의 맛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만큼 다양한 대답들이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 혹은 돈 또는

주변인들의 건강 등 다양한 대답을 들었지만 나는 아직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또 다른 이의 말을 들으면 그 말 또한 맞는 것 같았다. 사실 행복은 시시때때로 달라지니까 잠깐의 맛으로 구성된 것이 행복은 아닐까, 싶어서 깊게 공감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한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어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비밀의 한 꺼풀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시스템은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꼽았던 이유는 비밀을 밝힌다 혹은 풀어낸다 라는 말들을 정의한 것이 아니라 먹고, 소화하고, 삼킨다 라는 등의 IN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마치 새로운 정의 같았다. 비밀은 누군가에겐 약이 되지만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 세계에는 비밀이 난무하니까. 




키가 일 미터는 되는 듯한 긴 줄기에 은방울꽃 같은 흰 꽃봉오리 하나가 덩그러니 피어 있었다. 숨결에도 꺾일 듯이 가느다란 줄기였지만, 큰 꽃봉오리를 달고도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거, 너야." "네 손끝에서 같이 자랐어. 얘는. 그러니까 이거는 너야. 네가 땅속에 웅크려 있는 동안 이 꽃이 자라는 걸 보면서 네가 잘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나인이 본인의 탄생을 알게 되는 장면. 약할 줄 알았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버티며 태어난 나인.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았던 장면 중 하나였다.



"인간들이 정해둔 규칙을 지키는 거지. 외부인이니까."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다. 당연히 외부인 혹은 외계인들이 다른 행성에 온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략하고 정복한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묘사는 오히려 외부인이니까, 지구인보다 지구의 규칙을 잘 지킨다는 거였다. 신호등의 신호를 잘 지키고, 쓰레기를 올바르게 버리고. 언제든 내쫓길 수 있는 외부인들이 지구에 적응하는 법이다. 



"해가 지면 숲으로 가라. 그곳이 네가 피어나기 전에 있던 집이니까."


이유 없이 마음이 울렁이던 장면. 주인공의 고향이자 힘을 얻고 또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안겨주던 곳. 주인공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곳. 



"찰나의 표정이란 감정을 가장 진솔하게 비추는 호수의 수면 같은 것이다. 조그만 충격에도 금방 흩어지고 만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한때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곳이다."


만약 내가 나인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봤다. 아마도 나는 내가 먼저 확인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내 패를 들킬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인은 그러지 않았다. 우선 확인. 그리고 표정에서 가져오는 확신.

표정의 힘을 알았다. 표정에서는 말로는 감춰지지 않는 진실이 있음을 배웠다. 



"우연. 핑계로 쓰기 좋지만 실상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 치사한 단어."


우연은 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되곤 했다. 우연이 겹쳐서 필연이라는 문장도 있으니까. 

그렇게 믿었던 나에게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사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우연이라는 단어에 가두고 기대었다.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데. 



"가만 내버려 두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을 굳이 들춰내 소란스럽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사람을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수선하게 들쑤시고 다닌 당사자를 원망스럽고 귀찮은 눈초리로 바라보겠지.

'가만히 좀 있지.'라거나 '본인만 정의롭지.'라는 식의 말을 덧붙이면서."


개인적으로 이 책 전체 중에 제일 좋아하는 문장이다. 내가 지모를 좋아하는 이유는 성격이 닮은 부분이 가장 컸다. 특히나 저런 부분.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사건을 알리고, 공유하고, 보기를 원했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니가 겪은 일도 아닌데 왜 네가 더 나서냐 라는 말들을 하곤 했다. 오지랖이라고 했다. 

언제까지고 남일일 수 있을까? 바로 다음 날 본인에게 닥칠 수도 있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작은 공유로 세상을 아주 조금씩이나마 바꾸고 싶은 나에게, 사람들은 굳이 들쑤시고 다니는 불쏘시개 같다는 말들을 한다. 


그건 그저 남 일이라며 외면하는 방관자들의 편리한 자기 합리화의 말들이 아닐까.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게 구는 것이라고. 지모는 나인에게 가장 못 견디겠는 것 하나만 지키며 살라고 했다."


내가 몰랐던 것은 다수를 다루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항상 억울함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욕을 먹는다면 윽박을 지르며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지모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꾸준히 반대표를 던지며 일을 무산시키는 일이었다. 묵묵하게 그렇게 묵직하게 버티는 일이었다. 



"무언가에 박대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박대하지 않았는데."


상대적 박탈감과 관련된 문구였다. 항상 건강이라는 말 아래 갇혀있던 승택이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나인을 보면서 '너는 나와 같은 종이니까. 당연히 나처럼 살았을 거니까. 당연히 나처럼 아무것도 몰랐을 거야.' 그건 큰 착각이었다. 



"인정하기엔 부끄럽고, 껄끄럽고,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어느 나이까지만 믿음이 허용되는 존재."


생각해보니 그러했다. 원우가 죽었던 혹은 세상에 버림받은 이유는 아이가 아닌 나이에,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였다. 그러한 믿음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는 소문을 몰고 와 그 아이를 구석으로 몰고 갔다.


 원우는 말했다. '나는 내가 직접 본 존재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상한 사람이고 너네 아빠는 보지도 못한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인데 돈을 잘 벌어.' 사람들에게 종교와 관련된 신을 믿는다고 하면 유대감이 쏟아진다. 사람들에게 영화 캐릭터를 믿는다고 하면 재밌는 취미를 가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 큰 성인이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다고 한다면 현재 우리 세계에서는 어떤 반응들이 일어날까? 아마도 원우를 보는 시선과 같을 것이다. 정신이 이상한 애. 그래서 헛 것을 보고 그것을 말하고 다니는 애. 그런 기준은 어떤 기준인가 궁금했는데 저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어느 나이까지만 허용되는 존재. 이 세상에 과연 지구인만 살고 있는 게 맞을까?

 


"포기도 존중해 줘야 할 때가 있다. 포기는... 야, 포기는 진짜 어려운 거야."


누군가 고민을 상담할 때 대부분은 이루기 힘든 꿈일 확률이 높다. 그럴 때 상대방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말은 '그냥 포기해, 안될 거야. 마음고생하지 말고 포기해.'

정말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루는 게 어려울까? 포기하는 게 어려울까?라고 물어본다면 포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포기하는 게 더 어렵다. 사실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일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라고 믿는다. 

간절한 것에는 포기가 없다. 잊을만하면 다가와 한 번씩 말을 건넨다. 그 후에 포기는 미련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나의 인생과 함께 한다. 



"이건 아이인 적 없다는 듯이 구는 어른들이, 단 한 번도 동화를 믿어 본 적 없다고 착각하는 어른들이, 환상을 꿈꿔 본 적 없다고 믿는 우매한 어른들이 만든 끔찍한 이야기다."


사건의 시작이자 결론. 어른들이 박원우를 형용하는 단어를 구축하고 퍼뜨리고, 힘 있는 어른들의 말만 믿고 나약한 어린애를 괴롭히는 끔찍한 잔혹동화. 하지만 그런 어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게 가장 끔찍한 게 아닐까? 잘못을 저지르는데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없는 어른들.




다양한 책에서 배움을 얻었지만 이번 나인이라는 책을 통해서 당연하다 생각해왔던 것들이 깨지고 정의가 안 되어 머릿속에 흘러다닌 생각들을 정의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한 단계 배웠고 성장할 수 있었던 책. 

어른들이 만든 잔혹동화를 어린아이들이 힘을 합쳐 진실을 밝혀낸 이야기.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설정을 소설에서라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어린것은 약하지 않다. 단단한 어른의 밑에서 자란다면 단단한 아이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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