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by 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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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태풍이 한반도를 지나갔다. 자잘한 빗소리가 밤새 베개를 흔들었다. 희붐하게 날 밝아 마당에 나갔더니 분꽃이 잔디밭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받침대 박아 묶었지만 연하디 연한 줄기로 빗물에 젖은 무성한 잎을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잔디 위에 오무라진 꽃이 수북하다. 쓰지 않는 음식물 바께쓰 집게를 들고 집을 나선다. 젖은 길에 떨어진 나뭇잎이 달라붙었다. 밤 사이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다. 빌라 옆 산 아래 주차된 차들이 비뚤하게 빼곡하다. 늦은 밤 급히 차 세우고 집으로 뛰어갔을 거다. 읍내로 내려가 내성천 산책길로 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성긴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런 날씨에 아침 운동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는데 나이 든 여자가 우산을 말아 쥐고 걷는다. 내성천 물은 불어나 황톳물을 콸콸 아래로 밀어내며 흐른다. 천변 나무 쓰레기 위에서 백로가 물고기를 찾는다. 이삭이 팬 벼가 물결치는 들판을 지나 오수처리장을 지난다. 한편에 어도(魚道)를 만들고 막은 보 위로 불어난 물이 사나운 기세로 넘친다. 연밭에는 커다란 연닢이 바람에 흔들린다. 잎 뒷면의 하얀 속살이 뒤집혀 나부끼는 게 마치 광장에 모여든 성난 군중 같다. 비바람은 한반도의 어디를 마구 할퀴며 지나갔을까. 가슴 졸이며 비바람을 염려하던 사람들은 무사히 아침을 맞았을까.

건너편 산책로의 상수리나무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집에선 느끼지 못했는데 들에 나오니 바람이 거세다. 나무 아래 떨어진 도토리 이삭이 어질러져 있다. 우산을 바람 부는 쪽으로 펴고 집게로 도토리를 줍는다. 성숙한 도토리 알이 떨어질 시기는 아니다. 잎이 붙은 도토리 가지가 떨어진 건 바람 때문도 아니다. 도토리 거위벌레의 짓이다. 녀석은 도토리 알에 긴 주둥이로 구멍을 뚫고 알을 낳은 다음 가지를 끊어 땅에 떨어뜨린다. 도토리 속의 알은 부화해 도토리를 먹고 땅에서 월동한다. 도토리 거위벌레의 생활사를 틈탄 도토리 줍기다. 구멍 난 도토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갈라지고 썩는다. 도토리 거위벌레도 도토리마다 구멍을 뚫고 알을 낳기란 벅차다. 때론 기억이 가물해져 멀쩡한 가지를 끊을 때도 있다. 인간도 한 마리 정자의 수정을 위해 수억의 실패를 예비한다. 실한 놈만 골라 줍는다.

지난번 아내와 산책하던 날 도토리나무를 만났다. 아내는 도토리가루를 사다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올해는 틈틈이 주워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난 성가시다고 했지만 산책로에 나가는 게 버릇이 되었으니 갈 때마다 조금씩 줍기로 한 거였다. 도토리는 손이 많이 간다. 주워 말리고 겉껍질을 벗기고 방앗간에서 빻아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린 다음 다시 가루로 말리는 번잡한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겨울밤 쌉쌀한 맛이 일품인 탱글한 도토리묵을 맛보기 위해 그만한 수고는 당연하다. 편하게 사 먹기보다 줍고 움직이고 하는 게 생명활동이란 면에서 기꺼운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거개의 섭생이 자신의 노동과는 관계없이 화폐로 교환되는 사회에서 농촌에 살며 이만한 수고로 얻어지는 도락이 즐겁지 아니한가.

돌아오는 하늘에 제비 떼가 어지럽게 하늘을 난다. 날갯죽지에 힘이 붙은 새끼를 데리고 태풍 후의 성찬을 즐기는지 모르겠다. 찬바람 불면 떠나온 곳을 찾아 수천 킬로 바닷길을 건너는 제비는 지구를 마당 삼아 생명의 다아스포라를 힘차게 이어간다. 재일 작가 서경식 선생의 말 대로 '조국'이란 특정 지역이나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생태적 삶의 방식을 따르는 제비가 사라지면 봄도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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