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만의 상상일지 모른다. 그녀를 욕망하는 걸 주변 사람들이 알면 웃기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욕망에 들뜬 망상일 뿐이라고 비웃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난 위로가 필요했고 우연히 그녀를 만난 거다. 관습과 도덕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녀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나만의 비밀로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전언과 대화, 속내의 안부와 미로 같은 그리움만 간직해도 좋을까. 어이없게 남성을 내세우며 그녀의 내면을 향한 틈입을 원했는지 모른다. 덜컥 겁이 난 그녀는 sns를 끊었다. 아니 문자를 보았으면서 입을 닫는다. 생각 없이 처음의 제의를 받아들였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의아한 느낌이 들었을 거다. 왜 내게 이토록 내밀한 문자를 보내는 걸까?
서로 다 아는 상황에서 뭘 어쩌자는 걸까. 현재의 '좋은' 관계에서 발전할 무엇이 있기는 한 걸까. '법칙 없는 사랑, 시작도 끝도 정하지 않은 관계, 그릇이 없어 크기를 알 수 없는 사랑. 부부건 애인이건, '정상'이건 '불륜'이건 관습화 된 관계를 거부하고, 서로 성장하면서 외롭거나 일상이 지겨울 때 가끔 찾을 수 있는 '즐거운 외출' 그러나 만남의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 그러나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다. 그녀는 제도 안에서 자신의 영토를 지키려고 할 거고 영토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고통이 상존하는 상황이라도 구속의 자유와 책임을 버릴 생각이 없다면 그 생각을 인정한다. 가족조차 그녀/그의 선택을 흔들 권리는 없다.
요즘 쓰는 글들은 나를 지나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는 글은 '사생활'이 아니라, 내가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퇴근길에 사내를 만난다. 마치 저 혼자 정보를 독점한 듯이 전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토가 나온다. 그래서 어쩌라고? 인생이란 불가능성을 가능으로 믿고 싶은 사람들이 밀고 가는 행위다. 절망적으로 비관적인 입장이 아니라면 자신의 삶을 석 줄 정도의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차 포 떼고 비판적 인식이라면 대안의 관점이 뒷받침되어야 할 터. 그저 씹고 물어뜯기만 반복한다. 보편적 인권에조차 근접하지 못한다. 시각의 '촌스러움'과 상투성. 저 사람은 구제 불능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거개의 주민의 입에 걸린 습속과 단단히 못 박은 진부 함이었다. 사상, 이론에 의해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 바뀌는데 이때의 전복적 인식은 상대와의 동일성에 의해서다. 닮고 싶지 않다면 다양성을 인정하고 내버려 두라. 세상에'착한 사람'들의 구원과 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억울하면 부서지도록 싸우거나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 젠더가 구조화된 폭력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약하거나 찌질한 남자도 여성을 권력적인 시선으로 본다. 최하위 남성의 상대자는 최고의 여성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생각은 쓰겠는데 느낌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가족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나를 보듬는 것도 나뿐이다. 어미의 자궁을 그리는 건 알겠는데 거긴 나의 고향, 돌아갈 곳이 아니다. 그저 추억하는 것뿐. 인간은 태어나면서 너무 많은 길을 멀리 걸어갈 뿐이다. 현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가족 공생애적 관계를 불러내는 건 나-가족-고향-국가와 가족 간의 사랑-애향심-애국심으로 연결되는 습속의 도식에 학습된 결과다. 재일 작가 서경식은 나에서 출발한 애향심, 애국심이 세계와 평화로 이어지지 않는지 묻고 있다. 웃기지 않은가. 그래서 국가주의와 인권, 애향심과 가족애는 떨어져 있다. 누군가에겐 지독한 가난과 분열된 자의식이 조각 난 채로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고향은 오줌 눌 때조차 돌아서 누고 싶은 곳일 거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공평하지 않다. 미숙한 부모의 사랑에 반기를 들거나 저항할 권력이 아이에게는 없다. 그런 아이가 커서 성장하면 부모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지 증오와 원한의 감정을 품는 건 그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을 뿐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성인이 된 자식은 개별적 존재지 바람이나 소유, 구속의 관계는 아니다. 성장의 과정을 잘 아는 젊은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인간은 '학습받은' 대로 '착한 인간'의 역할을 연기하도록 노력한다. 착함은 부당함의 긍정과 불편함에 대한 참음, 현실의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니 착한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없다. 요즘 착하다는 건 바보 거나 뜨뜻미지근한 인간의 전형이다. 개성이 실종된 우유부단한 인물을 누가 좋아하랴. 좋은 게 모두에게 좋은 게 아니라 좋은 것은 개별적이며 개체적이다. 사회 정의는 누군가에겐 구속이요 부정의다. 그러니 보편성을 요구하기 전에 보편에서 배제되는 입장을 떠올려야 한다. 이렇듯 상황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칼로 물 베거나 두부 썰듯 명쾌한 건 진리가 아니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 2003>에서, 북한에서 대남 파견 활동가 훈련을 담당한 총책임자는 교육을 마친 훈련생에게 "잡히더라도 자살하지 마라, 고문당하면 고통받지 말고 전향해서 사회로 나가라, 현실에서 패배하는 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끝까지 살아남아라."라고 당부한다. 세상은 살아남은 자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