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48)
조용한 오전을 보내고 있다.
소읍의 외곽인 동네는 평일 낮이면 일체의 소음이 없는 고요함에 묻힌다. 주택인 우리 집은 손바닥만 한 마당에 잔디가 심어졌고, 화단에는 분꽃, 바젤 그리고 몇 해 전 군에서 나눠준 체리나무와 마가목이 자란다. 두어 포기 나팔꽃이 공중을 쥐고 올라가 이제는 체리나무를 점령했다. 앞집 지붕을 더듬는 줄기를 잘라냈더니 옆에 선 체리나무를 목표로 기어오른 거였다. 아침이면 족히 백 송이는 넘는 나팔꽃이 인사를 한다. 그저 안녕! 을 넘어 길게 늘어뜨린 덩굴에서 줄줄이 매달려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는다. 매일 나팔꽃의 인사를 받다 어느 결에 무심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한결같이 환하게 열린 얼굴을 보는 것도 마뜩잖다. 마치 생각 없이 열심히만 사는 '양민'을 보는 것 같다. 현재에 이르도록 십 년, 오십 년, 백 년의 역사는 까마득한 남의 일이 돼버린 무한경쟁에 쫓겨 밥벌이에 욕망과 쾌락의 셈법에 몰입하는 '착한 사람들'이다. 뒤로 돌면 지붕 위에 시들한 호박 덩굴이 폭격 맞은 것처럼 낙엽이 되거나 힘들게 새 잎을 키운다. 봄날 큰 다리에서 상인에게서 산 모종인데 초장에 커다란 늙은 호박을 달더니 이후로 애호박을 내는 데 인색했다. 아마 큰 호박에 영양을 뺏겨 새끼 치는 데 애먹었을 거란 짐작이다. 작년엔 늦게 달린 늙은 호박 덕에 연둣빛 보석 같은 애호박을 삼십 개 넘어 땄다. 아침마다 집안에서 호박 볶는 냄새와 된장국 끓는 소리가 진동했다. 화단 옆 장독대엔 고추장과 된장, 간장물이 익고 있다. 장독대 옆으로 기름한 화분에선 메리골드가 긴 장마를 견디고 왕성하게 꽃을 내미는 중이다.
열 평 남짓의 마당을 개관하는 데는 잠깐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지장물을 살피고 나면 자칫 빠뜨린 것이 있다. 빨랫줄 위로 사철 흐르는 바람과 햇살, 산 위를 넘어가는 구름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조잘대며 좁은 마당을 기웃대는 산새들 그리고 밤으로 구름 사이 교교(皎皎)한 달빛을 새벽까지 비추는 달이다. 땅과 하늘로 이어지는 공간에 사람이 산다. 백여 년 전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로운 세상을 외쳤다. 강토를 피로 물들인 공주 우금치에 간 적이 있다. 가을 무렵의 이른 아침에 도착했는데 고개 옆으로 난 길에는 출근 차량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기념비를 보고 있는데 장년의 등산객들이 전투가 벌어진 산 쪽으로 올라간다. 백 년은 짧고 긴 시간이다. 경험은 기억하는 자에게만 남는 법이다. 관군과 일군은 학의 무리처럼 흰 옷의 물결로 밀려드는 동학군과 계곡을 피로 물들였다. 전술 전략이 서툰 동학군은 무차별로 쏘아대는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의 난사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외세를 업고 백성에게 총구를 겨눈 정부군, 불의한 정권 탈취를 위해 시민에게 총칼을 휘두른 팝십 년대의 계엄군, 내 돈 쥐어주며 칼자루를 외국 군대에게 넘긴 정권. 미국은 약소국의 안보 따위엔 관심이 없다.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앞세워 조선을 전장으로 만든 왜군과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노림수에 우리 강토가 전쟁터로 변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래서 한미일 안보조약은 허구 중의 허구다. 어떤 바보 같은 나라가 제 돈 주고 도둑을 지켜달라고 굽실댄단 말인가. 고통과 치욕이 범벅이 된 학살의 현장에서 고아처럼 라면을 삶고 산밤을 주웠다.
오늘부터 야간근무다. 객실에 손님이 들지 않는 한밤에는 할 일이 없다. 손님이 들었어도 자정 넘으면 조용하다. 고기 뒤집고 떠들던 손님들도 자기 때문이다. 어쩌다 카드를 꽂은 채 산책 나온 손님이 문을 열어달라거나 이부자리가 더러워 바꿔달란 손님이 있을 뿐이다. 집에서 저녁 먹고도 한참을 핀둥대다 아홉 시 반에 출근한다. 교대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당직실에 엎드려 책 읽거나 야구중계를 보다 잠든다. 까만 계곡엔 물소리와 잠 설친 산새 뒤채는 기척 외엔 고요하다. 가끔 오줌 누러 나가 반딧불이를 만나기도 한다. 아연광산 막장에서 느낀 칠흑의 적막과는 결이 다른 계곡의 밤은 풍성하면서 쓸쓸하다. 아래 마을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산중의 고독은 소중하고 생산적이다. 홀로 있는 시간은 과거로의 사색이 주를 이룬다. 지나간 것을 추억하는 순간은 부끄러운 나와 유치하고 난삽한 기억이 겹쳐져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한다. 밥을 벌기 위해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 지나간 여자들의 얼굴이 알듯 모르게 떠오른다. 윤동주 시인이 노래한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이 겹쳐진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면 노동과 사랑과 섹스가 성찬이 끝난 식은 밥상처럼 흐르다 새벽을 맞는다. 희부연 동살이 트는 걸 보면 그만 풀이 죽고 만다. 부끄럽게도 오래 산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