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49)

요 며칠 조용히 지낸다.
조용히 지낸다는 건 아무 일도 없다는 건 아니다. 계속되는 일상이 전과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밥을 끓이고 (주로 아내가 하지만) 가끔 술을 마셨다. 차를 고치러 가기도 하고 천변에 나갔다 들어오기도 했다. 오전 오후 야간으로 이어지는 삼 교대 근무는 변함없고, 코로나 이 단계 후 풀베기나 풀 뽑기 외에 휴양림에는 일이 엄청 줄었다. 손님이 없으니 일이 대폭 줄었어도 시간 죽이는 게 큰일이었다. 그나마 풀이 무성할 땐 매일 예초기 돌리며 땀을 쏟았지만 벨 풀도 남아나지 않는 요즘엔 일을 찾아서 해야 할 판이다. 둘러보면 할 일이야 없겠냐만 자잘한 일뿐이어서 힘쓰고 말 것도 없이 시간 때우는 게 태반이다.

끄느름한 하늘에서 비가 떨어진다.
산림휴양관 앞에 쏟아진 토사를 치우고 마른풀을 쓸어 담다 창고 물받이 아래에 앉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나는 체질이라 오전부터 옷이 젖는다. 엊그제 마신 술도 한몫했으리라. 담당과 공무직은 안내실 마당에서 아침부터 나무 탁자의 때를 벗기고 오일 스텐을 칠한다. 혼자 해도 할랑한 일을 둘이서 번갈아 해 가며 시간을 문지른다. 딱히 지시할 업무도 없는 상황에서 출근하면 알아서들 풀 뽑으러 올라가는 분위기다. 코로나 19 일자리 공공근로 아주머니 셋은 어제 일한 구역으로 올라갔다.

요 며칠 잡문 쓰기는 접어두고 두 사람의 책을 집중해 읽는 중이다. 재일작가 서경식과 여성학자 정희진이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이고 정희진은 한국에 산다. 서경식은 일본에서 써 보낸 한겨레 칼럼 '심야 통신'을 보고 처음 알았다. 두 작가의 책을 읽다 박하사탕을 먹다 혀를 깨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희진은 여성학 강사고 평화학을 연구한다. 읽고 쓰는 게 직업인 그는 여성주의를 말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속엔 자신의 사유의 범위가 페미니즘에 한하지 않는다는 걸 함의한다. 성별을 초월한 인간 문제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정희진처럼 읽기'는 도움이 될 거다. 서경식은 일본에 사는 한국 국적의 학자다. 재외 국민으로 살면서 식민의 역사와 차별을 겪으며 전쟁에 대한 경계와 평화의 실천적 노력을 꾸준히 제기하는 지식인이다. 단순히 디아스포라적 절망의 전언에 머무는 게 아닌 삶의 전망과 좌절을 동시에 다루는 그의 질박하면서 서늘한 문장에 멈칫대고 만다. 그를 읽으면 인류 문명의 참혹한 역사와 그것의 고통을 딛고 성찰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와 무 각성에 대한 속살을 느낄 수 있다. 독서는 맥락이다. 두 작가를 읽다 보면 그들의 독서 지평을 더듬지 않고는 못 배긴다. 변화는 확장성을 띠었을 때 성장한다. 전복적인 인식이라기보다 착종된 인식의 전환이라 해야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정희진은 '보편적 인간'에 대한 개념에서 '보편적'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권력의 위계는 역사 이래 젠더와 언어에서부터 차별을 전면에 두르고 작동한 시스템이다. 하물며 여성주의, 페미니즘이나 사고의 첫 단추가 올바르게 꿰어졌다고 보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묘지를 찾은 서경식은 인류 문명사의 어둠을 몸으로 부딪친 인물을 천착하는 여행을 한다. 그의 지성은 문학, 음악, 미술 등 인간의 전면적 삶에 두루 미친다. 두 형이 모국 유학생으로 조국에 건너왔다가 간첩 누명으로 각각 17, 19년 장기수로 복역한 것이나, 어릴 적부터 재일한인으로 차별과 갈등을 견디며 키워온 인간 존재론적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그의 치열함은 내게 서늘한 반성을 일으키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한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음악과 미술 감상, 여행 또한 취미에 머무를 수는 없다. 삶의 부면에서 소중한 생명활동의 하나다. 노동을 통한 생명활동으로 부를 얻지만 대다수는 결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인간은 풍요가 멸절된 상태에서도 감정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존과 연관 없는 행위에서 만족을 느낀다. 말이 잘못되었다. 전자의 예술과 여행은 실은 생존과 가까운 관계다. 그중에서 앎을 통한 인식의 확장은 치밀한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태어나 학습화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이 오염된다. 관념과 습속의 교육은 몸과 정신에 스며들어 이후의 인생을 좌우한다. 어릴 적의 순수한 상태를 복원하는 방법의 하나가 맥락으로서의 독서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호불호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기질의 차이도 있겠으나, 실은 '오염된 학습'의 결과가 태반을 차지한다. 두 작가의 출판물을 읽으며 금맥을 찾아가는 광부처럼 독서의 맥락을 더듬는 일은 지난한 환희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한계성에 이르는 회의를 포함한다. 비인 부전(非人不傳)이란 중국의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가 제자들에게 한 말로, 스승이 판단해 적합한 인물이 아니면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에 완벽한 스승은 없지만 훌륭한 스승은 있고, 그 스승은 훌륭한 제자를 길러 내기 마련이다. 서경식을 만난 사람들, 정희진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 중에서 확장된 사유의 성과는 크고 깊을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재는 각자도생이란 시니컬한 가치관으로 옹립한 시대의 절정이다. 욕망은 터질 줄 모르고 부푸는 풍선이 되었고, 삶은 전쟁터가 되었다. 눈앞에는 행복과 도락이 양날의 검처럼 명백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행복도 삶의 도락도 시체 위에 세운 화려한 묘원(墓園)의 등불, 눈물 젖은 어두운 빛이다. 선택은 자유다. 작가의 몸과 정신으로 써나간 문장을 노 삼아 어두운 시대의 붉덩물을 건너가든 오류의 격랑에 몸을 던지든.

해 짧아지고 서늘해졌다.
가을 다가오는 걸 몸으로 느낀다. 화살나무 이파리는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조락한 시대의 예언처럼 여기저기서 병든 낙엽이 우수수 날리다 추락한다. 오사리잡놈의 가을도 서서히 저문다. 화목보다 불화란 낱말을 좋아한다. 화목에는 묵인, 강요, 꾸밈, 거짓이 느껴진다. 반대로 불화에는 깨뜨림, 파고듦, 절망, 비상 같은 느낌이 마구 버무려져 가슴이 뛴다. 뛰다 못해 내가 나의 껍질을 벗고 튀어나간다. 불안한 태생이 시대와 불화하는 생리로 진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의는 나의 자유로부터 비롯된다. 구속된 자유! 인간은 누구도 존재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보편적 인간'의 '보편'에 대한 회의처럼 자유의 구속이란 구속의 자유가 될 수도 있다. 자의적이 아니라 천지 불인(天地不仁)의 삶이 그렇다. 붉나무 불콰한 이파리가 가을비에 떤다. 덩달아 내 가슴도 방망이질이다. 집에 가면 허튼 낮술에 취해 볼까. 쌀쌀맞은 계집에게 따스한 전화질이라도 넣어 볼까. 선득한 빗발에 초가을 숲이 오소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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