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60)
반장
시골집을 사서 수리한 이듬해 늦봄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막 땅내를 맡고 살이 오르기 시작한 고추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탁구공만 한 사과알이 우수수 떨어졌다. 오래된 시멘트 기와는 멀쩡해 보여 손대지 않았는데 우박을 맞고 비가 줄줄 샜다. 벽을 타고 문설주에서 떨어진 빗물이 머리를 때렸다. 퍼뜩 정신이 들어 아내에게 sos를 보냈더니 당신이 알아서 하란다. 먼저 시골로 내려가 맨날 핀둥이는 꼴이 보기 싫었나 보았다. 고용노동청에 갔더니 베어링 공장 청소업체를 소개했다. 땡볕 쏟아지는 중복 날 출근했다. 칠 년 전 내 시집 출판기념회 날도 중복이었다. 폭염을 덮쓰고 모인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철판 위의 고기를 뒤집으며 축하해주었다. 새벽길을 달려 출근해서 종일 오천 평이 넘는 공장 안팎을 돌며 휴지통을 비우고 담배꽁초를 주웠다. 보름 동안 발바닥에서 불이 났다. 외제 청소차를 타고 바닥에 물을 뿌리고 걸레질을 했다. 한여름 공장 안뜰의 풀베기로 얼굴은 금세 숯덩이가 되었다. 소사장제로 돌아가는 공장의 형편과 쉴 새 없이 기계에 매달려 이 교대 근무로 얼굴이 노랗게 뜬 청년들과 외국인 노동자를 보았다. 그들에게 시급 몇 십원 차이는 엄청나다. 남쪽 제철소에서 날아온 철선을 잘라 불에 구운 다음 두드려 베어링을 만들었다. 공장 안은 열기와 수증기로 가득 찼다. 오며 가며 인사하는 중국인, 필리핀, 베트남인과도 친해졌다. 그들은 장시간 노동을 견디며 낯선 땅에서 꿈을 키웠다. 팔뚝에 털이 수북한 백인은 러시아에서 왔다고 했다.
가을 체육대회에서 청소업체가 공설운동장에 말뚝을 박고 줄을 긋고 쓰레기를 치웠다. 사람이 머문 곳에는 반드시 쓰레기가 생겼고 누군가의 일감으로 남았다. 야간작업자가 항아리에 토해낸 컵라면을 비우는데 초승달이 걸려 나왔다. 석 달 열흘을 다닌 끝에 지붕개량 작업비를 맞춤하게 벌었다. 덕분에 낡은 기와 위에 깔끔한 강판이 씌워졌고 사표 쓸 날이 다가왔다. 일을 그만둔다고 하니 청소업체 사장과 총무부장은 팀장을 시켜줄 테니 계속 근무해달라고 했다. 완곡히 거절하고 다시 룸펜으로 돌아갔다. 군청에서 기간제 일자리를 얻어 숨통을 트는 게 낫겠단 요량이었다.
초등학교 때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다. 전출지에서 서너 달 근무하고 부대를 옮기면 가족도 따라갔다. 초등 이학년까지 서너 군데 학교를 옮겼으니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는 건 당연할 터. 당시엔 성적순으로 반장을 뽑았다. 어느 해 여름 방학식을 하고 집 앞에서 노는데 담임 선생님이 자전거로 퇴근하시며 '이학기엔 네가 급장이야' 하고 손 흔들고 가셨다. 기쁨도 잠시 방학 중에 이사 가는 사태가 벌어졌고 반장은 물 건너갔다. 전학 간 학교에서 적응할 무렵 선생님이 줄반장을 시켰다. 나는 모처럼의 감투에 어깨가 으쓱해져 아이들을 호달궜다. 조회 시간에 줄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호되게 야단쳤다. 완장의 위세를 너무 부린 탓인지 학급 회의 시간에 친구들은 입을 모아 나의 전횡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고민하던 선생님은 대중의 뜻을 받아들여 나를 줄반장에서 직위 해제시켰다. 이학년을 마치고 예편하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로 응원단장을 한 것 외엔 한 번도 반장을 하지 못했다.
육수처럼 땀 쏟으며 풀 벤 게 엊그제 같은데 아래께는 칼바람을 맞으며 눈을 치웠다. 휴양림 계곡에 쌓인 눈은 치워도 치워도 좀처럼 줄지 않았다. 장갑이 젖었다가 다시 얼어 터졌다. 야간 조와 새벽 출근 조를 마치면 휴양림 기간제 근무도 계약 종료다. 한여름 쌀가루 같은 밤하늘의 뭇별과 가을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휴양림 근무가 쏜 화살처럼 날아갔다. 동료들은 벌써부터 내년 봄의 일자리를 궁리한다. 그러면서도 숙소 청소일이 마뜩지 않은 남자 동료들은 다음엔 휴양림 근무를 지원하지 않겠단다. 난 군청의 녹지과에 들어가 간벌과 풀 베는 게 체질이라고 했다. 실은 다양한 근무 환경을 경험하고 싶은 속내다.
막달에 들어서면서 숙소 청소 외엔 일거리가 줄어든 겨울이다. 담당 공무원과 대화하는 횟수도 많아졌는데 반장을 시켜드릴 테니 다음 파수에 꼭 지원하란다. 누구라도 잔소리를 싫어하지만 나 또한 자잘한 업무 지시에 따라 그때그때 움직이는 것보다 스스로 찾아서 일을 하는 성격이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묵묵히 일했다. 요령 피우는 몇은 동료들의 미움을 샀으나 이해한다. 어쩌다 보니 전체 근무자 중에 나이가 제일 많아 일마다 두 팔 걷고 나섰다. 나이가 벼슬은 아니지 않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기간제의 직제에 없는 반장 자리를 제안한 거였다. 어쨌거나 직급은 허울이라도 책임이 앞선다. 눈에 뜨이지 않게 일하는 게 보짱 편하다. 나무 자격증도 밥벌이에 보탬이 되는 셈인데 살아온 이력으로 일속의 셈평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웬만한 일은 일머리가 뻔했다.
살아오며 노동조합 홍보부장을 하며 파업을 주도한 것과 광고회사의 매체 부장을 한 게 전부다. 민예총 문학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대리 차장 과장 등의 직급은 업무의 연차와 숙련도에 따라 자연스레 주어졌다. IMF가 터지면서 부하 직원을 자를 때는 내가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결국 사표를 쓰고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나무 자격증을 따고 숲 가꾸기를 하며 밥을 벌었는데, 발목 굵어지는 아이들 교육에는 턱도 없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 강원도로 떠났고 수목관리로 십오 년을 보내다 자의 반 타의 반 퇴직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가 있지만 기회는 노력하고 준비하는 자의 몫이다. 일해도 여축없는 시든 밥을 벌면서 꿈은 언제나 자유하는 삶이었는데 녹록지 않았다. 쥐꼬리 연금이나마 받으니 지금처럼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반년 일하고 반년 동안은 책 보며 여행하고 쉬었으면 좋겠지만 아내의 생각은 다르다. 모아논 것 없는 살림에 죽기까지 몸을 움직여 벌어야 한다는 거다. 다행이라면 아이들 크고 나서 통장 잔고가 조금씩 불어간단 사실이다. 여전히 반을 떼어 아내에게 상납하지만 남은 건 내 차지다. 용돈을 타 쓰던 과거와는 형편이 급상승으로 나아진 거다. 적은 돈이나마 순전히 나를 위한 소용으로 쓸 수 있다는 건 즐거움이다. 얇은 월급봉투로 쪼잔한 거지처럼 살았다. 이 땅에 사는 거개의 가장이라면 공감하고도 남겠다는 생각이다. 곰곰 되새겨 보니 반장이든 한 장이든 리버럴한 성벽에 어울리지 않은 접두어란 느낌이다. 사회와 제도, 관습과 타인의 시선 속에 자연인으로서의 '나'도 힘든 판국에 너저분한 명찰을 달 필요는 없다는 확신을 굳히기로 마음먹는다.
김 반장, 코로나 뚫고 여행이나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