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62)
휴양림에서 마지막 밤이다.
야간근무 마지막 날인데 출근하니 동료가 알려줬다. 코로나 확산으로 모레 이후 휴양림 폐쇄란다. 내일과 모레가 휴무니 난 오늘이 마지막 근무인 셈이다. 동료에게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하고 시간 되면 읍내서 밥 먹자고 했다. 동료는 나도 고생했다며 손 흔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손님이 들지 않은 밤의 조명은 모두 껐다. 며칠간 뚝 떨어진 기온 탓에 오늘 밤은 포근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당직실로 통로 바닥은 얼어서 미끄럽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재수 옴 붙는다. 마지막 날 낙상이라니. 여름부터 겨울까지 일했다. 다시는 휴양림에서 일할 기회는 오지 않을 거다. 미련도 정도 없다. 함께 땀 흘린 사람들의 기억이 소중할 뿐이다. 기간제는 사업이 종료되면 끝이다. 죽으면 삶이 끝나는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다만 숲과 계곡에서 사유한 흔적을 붙안고 기억이 희미해질 때까지 기억하는 거다. 교대자의 차가 계곡을 빠져나가자마자 사물함의 소지품을 챙겨 차에 실었다. 텅 빈 사물함 바닥의 먼지를 적신 휴지로 깨끗이 닦았다. 샤워하고 싶은 맘이 사라져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누웠다. 전열판에 달궈진 방바닥은 뜨겁다 못해 절절 끓는다. 깊은 산중에 홀로 누워 맞는 밤이라니.
겨울 동안의 두어 달을 어떻게 보낼까 여태껏 생각 중이다. 코로나가 숙지지 않는다면 차박(車泊)이 답이다. 동계 침낭에 들어가 자고 밥은 혼자 끓여 먹고 휴게소에도 들리지 않으며 철저히 일인 여행을 계획 중이다. 남도에 내려가 섬 두어 곳을 둘러볼 생각이다. 처음엔 마음의 상처를 매만지며 거처를 옮긴 후배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접기로 했다. 바이러스 시국엔 되도록 만나지 않는 게 배려다. 소나무를 다듬어주기로 한 멀리 사는 친구 네는 방문의 허락 유무에 따라 유동적이다.
밤새 꿈과 등짝을 굽는 열기에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쳤다. 새로 다섯 시에 일어나 얼굴을 씻고 외국어 공부를 했다. 오전 근무로 눈 비비고 달려온 동료와 그간의 노고를 서로 위로하며 손 흔들고 계곡을 내려갔다. 전용도로를 피해 옛길로 접어들었다. 반년 동안의 휴양림 생활을 반추하며 천천히 귀가하고 싶어서다. 길가에 드문드문 어둠에 묻힌 시골집이 졸고 있다. 뽑지 않은 배추가 미라가 된 채 허옇게 말라간다. 양조장 지나 닭실 마을 굽잇길을 돌았다. 장례식장은 손님을 떠나보내고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의 삶과 비례했던 화려하게 늘어선 조화는 말끔하게 치워졌다. 죽은 자에게 축복을!
야간근무 한 날 오전에는 병 걸린 닭처럼 존다. 아내의 명대로 마트에서 간장을 사고 텔레비전을 켠 채 손끝이 부르트도록 땅콩 까다 졸았다. 땅콩은 고소한 알맹이보다 껍질이 수북하다. 틈만 나면 집을 뛰쳐나가려는 내게 아내는 부러움과 의심의 눈초리를 날린다. 한 달을 맘껏 쉬어보는 게 소원인 아내는 이틀을 쉬고 나서도 몸이 무겁단다. 이사 온 뒤 누적된 노동의 피로는 쉬 가시지 않는다. 일을 그만두면 다음 일자리 찾기가 수월치 않아 어쩌지 못하고 계속 시지프스 노동이다. 조금 일하고 노는 난 눈치만 살핀다. 노동하는 인간보다 놀이를 일처럼 하고 싶다.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게 나을까.
이번 여행은 철저히 비대면 여행이다. 재난 영화를 많이 보았다. 태풍이나 지진, 화재 등의 재난은 지속적이지 않고 재난 상황이 지나가지만 바이러스, 전염병, 좀비의 창궐 등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절망적인 엔딩 컷을 보며 현실의 상황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사람이지만 현실에 기반한 미래 또한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지구는 속속들이 오염되고 망가지는데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정치와 경제, 복지와 번영이라는 제도나 달콤한 전언인 아포리즘도 인간 존재를 궁극적으로 구원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평화를 끌어오지도 전쟁을 막지도 못한다. 종교를 가졌거나 백 년 안팎의 유한한 생명이 오히려 축복일 정도다. 의지적으로 상황과 조건을 선택해 태어나지 못한 존재로서 살아내기 위해서 고투하는 상황이 전부일뿐이다.
여행은 이방인이 되어 낯선 고장(나라)으로의 틈입하는 행위다. 보고 지나치는 관광이 아닌 부딪침의 충격은 여행의 속성인데 코로나 이후 여행의 모습도 달라진다. 만나고 헤어짐의 대면 상황은 배제되고 사물과 풍경을 관찰하는 데 그친다. 물론 역사적 의미로서의 사적지를 방문하고 느끼는 감회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철저히 사람을 회피하는 일정으로의 행동만이 가능하다. 사람 사이에 바이러스가 매개되어 신뢰를 막아선다. 키스는 전염으로부터 '너'를 신뢰하는 행위다. 너를 믿음으로서 나는 너의 입술과 타액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바이러스는 키스는 물론이고 대화나 만짊조차 불신의 대상으로 삼았다. 불신의 발전은 혐오인데 혐오에는 논리적 이유가 없다. 사적 감정으로서 네가 싫다는데 무엇을 따질 텐가. 연민조차 비닐막 너머에서 가능한 시대는 불통과 단절의 시대다. 그런데도 난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