當日于歸
새벽 공기가 차다.
입김은 마스크에 달라붙고 콧속은 냉기로 근질거렸다. 핫팩을 꺼냈다. 지난번 완도에서 톡톡히 덕 봤는데 주머니 속에서 금세 뜨끈한 열기가 퍼졌다. 어둠이 벗겨지기 시작하는데 소읍은 여전히 이불을 덮쓰고 미동도 없다. 큰다리 건너자 택시기사 두엇 자판기 커피로 언 속을 녹이고 있다. 자가용이 서더니 짧은 머리의 남자가 내린다. 한쪽 어깨로 가방을 메고 대합실로 들어간다. 뒤이어 나도 들어갔다. 어두컴한 대합실에 그와 둘뿐이다. 매표구의 불빛이 그나마 터미널이란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봉화에서 재산까지 전세버스 탄 것처럼 나 홀로 시골길을 달렸다. 명호에 다다르자 낙동강 상류는 가장자리부터 꽁꽁 얼어붙었다. 가운데로 간신히 물줄기가 지나간다. 정류장마다 부지런히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중간에 타고 내리는 사람은 전무했다. 시골 장도 폐쇄되고 일요일이니 집에서 한 발짝도 꿈쩍 않는 모양이다. 재산에서 영양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시간이 빠듯했으나 기사는 익숙한 산길을 날래게 달려 제시간에 내려주었다. 햇발이 비치니 집에서 나올 때보다 추위는 한결 눅었다. 마을은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굴뚝에서 풀어헤친 하얀 머리칼 같은 연기가 꾸역꾸역 피어올랐다. 잔설이 깔린 바위며 밭흙이 덜 깬 술꾼 얼굴처럼 불그레하다.
영양읍까지 가려다 지도 검색을 하고 주실마을에서 내렸다. 조지훈 생가가 있는 곳이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1920~1968)은 데뷔작 「고풍의상」, 「승무」등이 대표작이 되었고 19살의 조지훈을 추천한 이는 시인 정지용이었다.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였던 그의 시 「다부원에서」다. 낙동강 전선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졌던 다부동 전투와 전쟁의 비극을 담았다.
다부원에서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는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한양 조 씨 마을을 둘러보고 성경책을 끼고 교회 가는 주민에게 차 시간을 물었다. 열 시 열한 시 차가 꼬리 물고 온다며 길 건너 가리킨다. 다리 건너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버스 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열시라고 했는데 시간 지나도 깜깜소식이다. 배낭에서 간식을 꺼내 먹고 인삼밭 터 서리에 오줌 누고 하다가 일요일이라 운행 시간을 건너뛴 걸 알아차렸다. 다른 지방의 경우를 봐왔기 때문이다. 결국 한 시간을 기다려 영양행 버스를 탔다. 그동안 지나는 차에게 손을 들었는데 하나같이 매몰차게 지나간다. 그러나 어리석음이 뒤통수를 친다. 낯선 사내를 차에 태워줄 리도 없거니와 요즘은 코로나 시국 아닌가. 나라도 겁내 꺼렸을 일을 바라다니.
이젠 가물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영양은 이십 년 전 풀 베러 갔다가 철사에 발등을 찔려 파상풍으로 일주일 병원 신세를 진 곳이다. 휠체어 타고 들어갔다가 걸어서 나왔다. 재작년 여름 자전거를 타고 안동 포항 영덕을 거쳐 지나치기도 했다. 호국공원은 영양 터미널 바로 뒤 언덕에 있었다. 그곳엔 남자현 김도현 엄순봉의 삼의사(三義士) 비와 오키나와에 징용으로 끌려간 희생자를 기리는 한의 비가 있다. 널따란 공원에는 충혼탑이 중앙에 자리하고 주변에 반공 애국투사의 기념비가 늘어섰다. 한의 비는 야산 주변의 밭에 둘러싸인 데에 떨어져 있었다. 중천에 떠오른 해가 터를 쪼이고 있다.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한반도에서 만육천여 명이 위안부 학도병 군부(軍夫) 등으로 끌려가 만사천오백여 명이 희생되고 살아 돌아온 자는 극소수였다. 경북에서도 삼천여 명이 끌려갔다. 영양 출신 고(故) 강인창 씨의 징용 증언집을 참고한 오키나와 대학 교포3세 오세종 교수는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를 썼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일제강점기 동안 희생된 조선인 사상자는 사백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현재도 전쟁을 반성하지 않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하고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의 각성은 멀게 느껴진다. 뜻 있는 일본 시민단체에 의해 똑같은 '한의 비'가 오키나와에도 세워졌다.
버스여행에서 주의할 점은 시간표를 잘 챙기는 일이다. 자자체의 관내를 운행하는 시내버스는 경계를 넘는 지역에는 정말 드물게 다닌다. 어떤 마을엔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들어간다. 지역과 지역이 이어지는 코스는 여행자의 욕심인가. 남자현 지사 생가를 들르려다 깐딱하면 길에서 밤새우게 생겼다. 돌아가는 차 시간을 도무지 맞출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차 시간을 보고 편의점 김밥을 사서 보온병 커피와 함께 대합실에서 먹었다. 이런 날 시장 순대국밥에 소주 한잔 걸치면 딱이겠는데 코로나는 이도 저도 막아선다. 여름이라면 길 가다 저물면 아무 데라도 잠자릴 펴면 되는데 한겨울엔 도시 엄두가 안 난다. 목표했던 세 곳 중 두 군데를 봤으니 위로가 된다. 봉화군에서 재를 넘어 영양군을 넘나드니 왕복 삼백리가 넘는 행보다.
겨울은 산과 들은 물론 사람까지 숨죽이는 계절이다. 스치는 산하에 근동의 역사가 배어 있다. 멀리는 닳고 단 삼국시대 마애불의 미소가 논배미 한켠에 현재를 보고 가까이는 한말 의병의 흔적이 독립운동의 자취가, 일제강점기 징용과 한국전쟁의 고통이 면면히 녹아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만 기억한다. 먹고살기 바빠서 다른 것 할 게 많아 들여다볼 여가가 없다. 현재에서 옴치고 뛰기도 버거운데 과거 타령이냐고 투덜댄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현재와 미래를 미루어 짐작하기조차 성가시다. 민족과 인류애도 자본 앞에서는 얼굴 붉히는 마당에 도대체 과거의 극한 고통이 나의 유익과 무슨 상관있느냐고 시니컬하게 외면하고 현재에 충실한다.
영양에서 넘어온 버스가 시동을 걸고 봉화로 가는 버스 기사는 오줌 누러 간다. 두 사람은 안면이 있어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재산면 버스정류장은 경계의 자리다. 경계는 이쪽과 저쪽이 넘나드는 갈래이면서 물길이 만나는 합수머리이기도 하다. 시대마다 이념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질을 해댔지만 인간의 생각만큼 위험하고 허황된 데마고기도 없다. 한반도에서 본토 일본인으로서 식민지 대중의 고통을 조선인과 더불어 체험한 이소가야 스에지(磯谷 季次)는 남과 북을 넘어 보편적 인류애인 휴머니즘을 몸으로 실천하고 떠났다. 영양읍 호국공원의 우뚝 선 충혼탑을 보니 마음이 무겁다. 시대를 뜨겁게 살다 간 이들의 영혼은 안식을 찾았을까. 돌아가는 버스의 기사가 알은 체한다. 우린 이미 구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