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71)

할 수 있는 것만 하기로 한다. 인간의 능력과 행위는 비례할 테니까. 언제 내가 능력 밖의 행위를 한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갈수록 인지능력과 기억력이 떨어진다. 신체의 노화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것을 늦추려고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지만 언제까지 늦춘다고 될 일도 아니다. 섬망과 치매는 증상이 비슷하나 의학적인 기준으로는 엄연히 다른 병이다. 피난지에서 홀로 상경하여 경기 여중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했던 막내 고모는 똑똑한 머리로 평생을 살았다. 탤런트 김혜자와 경기여고 동창이다. 지금은 미국에 가서 외동딸에 의지해 말년을 보낸다. 고모는 마당에 야생 사슴이 지나가는 콜로라도의 산골 마을에서 섬망과 치매 증상을 오간다. 고모에게 평안을!

낡은 장롱을 버렸다.
시골로 내려오면서 원목 장롱은 탈방이는 이삿짐에 끼여 서울에서 경상도로, 강원도 땅으로 다시 경상도로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수십 년 이불과 의복을 반듯하게 품어주었던 장롱과 이별할 때가 온 거다. 내 방에서 장롱을 떠나보내자 감옥 독방(1.5평)보다 작았던 방이 운동장만 해졌다. 내 방은 두 평(6.7m²)이 되었고 전직 대통령들의 구치소 독방 넓이는 세 평이다. 행거에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옷이 나온다. 캐주얼한 차림의 입성을 즐기던 내가 오래된 콤비 대신 한 벌 더 장만하려고 생각만 했는데 떡 하니 걸렸잖은가! 생전 처음 보는 가벼운 파카가 또 나온다. 음음, 암만 생각해도 입었던 기억조차 글리포셰이트(Glyphosate) 먹은 아카시나무뿌리처럼 되살아날 가망 없는 기억. 머릿속에 지우개가 자라는 느낌이었다. 퇴근한 아내에게 물으니 콤비 상의는 당신이 꼭 원해서 작년에 함께 가서 샀단다. 가벼운 파카는 바스락대는 소리가 싫다고 사고서도 몇 번 입지 않았단다. 콤비고 파카고 내 기억에서 알코올처럼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신체 감각의 노화는 눈이 어두워지거나 가는귀먹으면 안 그래도 듣잘 것 없는 세상 보지 말고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기억은 판단의 문제와도 관련이 되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능력이다. 고추 심는 순서와 빨래하는 순서를 까먹으면 고추 모종 심고 비닐을 깐다거나 세탁기에 빨래 돌리고 난 다음 세제를 붓는 격이다. 아들을 아버지로 보는 셈이니 일상은 망가진다. 함께 늙으며 오래 보던 연예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텔레비전 보다 아내에게 물으면 이름은 생각나는데 성이 떠오르지 않는단다. 내가 성을 알아맞힌다. 이름도 성도 둘 다 기억나지 않으면 포기하고 다음 기회로 미룬다. 만약 혼자서 생각나지 않으면 물어볼 사람도 없다.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은 하나하나의 역사를 내포하는 상징적인 기능을 한다. 기억하지 못하면 주변의 자잘한, 상대를 상대이게 한 질료를 녹여버리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도 기억하지 못하면 되풀이된다. 팽목항에서 본 세월호의 낙서 중 '기억하지 못하면 진실과 멀어진다'는 글이 기억에 남는다.

후배가 책 제목을 보내달라고 했다. 미국의 작가가 고집스러운 어머니와 말년을 함께 보낸 이야기다. 후배도 치매 앓는 고집스러운 엄마와 함께 산다. 엄마는 아들을 되뇌며 늘 아들 네로 가는 짐을 싼다. 아침이 되어 짐을 든 엄마와 집 앞에 나가면 데이케어센터 차가 기다린다.'엄마, 짐 무거우면 내가 들어줄게' 후배는 엄마의 짐을 낚아채 자가용에 던진다. 엄마는 손을 흔들고 센터 차에 탄다. 매일 이런 식이다. 후배는 직원을 모두 재택근무시키고 한 달 동안 텅 빈 사무실로 엄마와 손잡고 출근하기도 했다. 후배에게 언젠가 내가 읽은 책을 추천했는데, 문자 저장 기간이 넘어 삭제됐다. 책 제목도 작가도 기억나지 않아 도서관 홈피에서 나의 라이브러리를 검색했다. 삼 년 동안 600여 회를 대출했다. 제목과 내용을 교차해 떠올리며 훑는데 도무지 처음 보는 것도 흔치 않다. '내가 이 책을 읽었나?' '어떤 내용이었지?' 어떤 때는 읽었던 책을 서가에서 뽑아 든 적도 있었다. 읽을만한 제목을 나의 대출 이력에서 골라 다시 읽어야겠다. 결국 후배가 원한 책을 찾지 못했다. 내일 한둔 떠나기 전 도서관의 서가를 찬찬히 뒤질 생각이다.

예전엔 전화번호 열댓 개는 머릿속에 넣고 다녔다. 스마트폰의 스마트한 기능 덕분에 요즘은 가족 전화번호조차 외우지 못한다. 사물 인터넷은 편리함과 함께 인간의 행위 능력을 퇴화시킨다. 목소리 들으며 통화하기보다 톡이나 문자가 덜 불편하고 편하다. 일면식 없는 대중의 '좋아요'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청량제다. 고독한 개인은 sns 공간에서 일체를 이루며 안온한 집단성을 느낌과 동시에 탈락과 배제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친구 신청이 온다. 아는 친구와 연결되어 있다. 전언이 있었을까. 아는 친구의 얼굴을 봐서 친구를 허락한다. 거기까지다. 열에 아홉은 친구 수만 불릴 뿐 상대의 얘기엔 별무 관심이다. 글을 보지 않고도 '좋아요'만 누르는 사람은 그래도 관심은 있다. 댓글은 바라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유익과 관계되지 않는 상대편의 일 따위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친구 수 불리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친구를 허락하고 얼마간 지내다 삼수갑산이면 관계를 끊는다. 그도 날 삭제 키 하나로 간단히 지운다. 서로 밀고 당기는 줄이 없는 관계는 더 이상 관계가 아니다. 논의의 담론보다 차별과 배제, 혐오의 집단성을 모사꾼들은 추어올리고 주무르며 세를 불린다.

초등학교 때 국민교육헌장이 나왔다. 담임은 내일까지 모두 암송할 수 있도록 외우라고 했다. 하굣길에 나는 친구 앞에서 삼십 분만에 다 외워 보였다. 창의력 없는 암기 능력만으로 성적을 올리던 시절은 지나갔다. 그나마 남은 기억 회로는 끊어지고 비틀어져 하얀 연기를 피우며 지워진다. 돌다리를 두들기는 게 아니라 심 봉사처럼 돌다리를 쓰다듬고 안아가며 건너도 모자랄 판이다. 젊은 층의 시선에 비치는 귀찮고 성가신 존재, 생산성은 제로에 돈만 축내는 존재가 노인이다.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고,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진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인간은 소중하고 지혜로운 존재라는 말은 전설이 되었다. 대형 마트 푸드 코트에 노인 혼자 음식을 기다린다. 건너편 테이블엔 젊은이 둘이 연신 떠들며 그릇을 비운다. 벌건 대낮에 얼마나 따분했으면 이런 곳에 나왔을까. 두런거리는 노인의 눈가에 진물이 반짝인다. 폰뱅킹 홈쇼핑이 대세인 사회에서 편리함을 즐기는 건 젊은 쪽이다. 시골에선 읍내의 은행 업무를 보러 골짜기서 버스 타고 나온 노인들이 많다. 볼일 없어도 장날 장거리 서성이는 건 사람이 그립고 외롭기 때문이다.

오래 산다면 노인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거다. 아무리 자존감 높이고 자신한다고 해도 앞서간 노인의 대열에서 비켜가지 못하리란 걸 예감한다. 병들고 빈곤하고 외로운 노인은 청년 앞에서 주눅 들고 만다. 국민연금, 노령연금, 노인일자리 공공근로 등으로 노인들의 평균 수명은 늘어간다. 하지만 오래 산다고 행복한 말년은 아니다. 고령층으로 갈수록 노인 자살률은 증가하는 게 이를 반증한다. 모 원로작가는 뜻한 바 있어 절필을 선언했다. 지자체에서는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는 노인에게 공짜 버스표를 나눠준다. 작가는 나이 들어 무딘 사유의 문장으로 독자에게 혼란스러운 글은 생산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몸이 늙으면 정신 또한 몸의 느낌을 닮기 마련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얼마나 국량이 협소하고 착종된 인간이란 걸 안다. 고치려고 하고 금세 후회하지만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아내와 딸은 내가 배낭을 꾸리면 반색을 한다. 날만한 주제에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게 황감할 지경이다. 한밤중 잠 깨어 잠들지 못한다. 꿈에서조차 드러난 나의 졸렬한 도량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달려가 용서를 구할 사람이 널렸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무덤 속에서 용서를 빌어야 할 판이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변화와 성장은 노인이 되어도 소중한 명제일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변화는 더디고 성장은 멈추는 게 당연하다. 기죽을 필요는 없지만 집착할 이유도 없다. 오래 쓰고 닳지 않는다면,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라면 소중함의 가치는 애저녁에 없었으리라. 낮으로 며칠 푹하더니 한밤중 비 내린다. 봄이 오는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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