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70)

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의 변함없는 우정을 고마워하며 논어의 한 구절을 쓴다. 추사의 증조부는 영조의 사위였다. 어릴 적 남 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란 추사는 아버지가 유배되고 뒤이어 자신도 귀양 가는 처지가 된다. 19세기 정권의 암투 속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풍랑을 만나면 고기밥이 되고 마는 거친 바다 위의 섬 제주도에서 추사는 겨울의 삭풍을 맞으며 제자 이상적이 통역관으로 청나라에 드나들면서 가져온 서적에 빠진다.

큰 눈이 내린 날 산책하다 눈을 뒤집어쓴 소나무를 본다. 눈보라가 몰아쳐 하얀 털옷을 입은 것처럼 한쪽 옆구리가 허옇다. 푸른 바늘잎은 꼿꼿하게 얼어 손 대면 금세라도 부러질 것 같다. 동절기에 소나무 전정을 하면 가지 부러짐을 조심해야 한다. 꽁꽁 얼어붙은 잔가지는 건드리기만 해도 쉽게 툭툭 부러진다. 소나무 사이를 지나거나 소나무의 수관을 드나들 때 가지가 몸에 밀리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애써 다듬은 수형이 망가질 수 있다. 눈 속에 파묻힌 수목을 만나면 봄이 와도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다. 물관은 얼어버려 이동을 멈추고 겨울눈조차 댕돌같이 굳어 세포와 조직이 모두 죽은 듯 보이지만 땅 풀리는 해토머리 전부터 땅 속의 가느단 뿌리는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깨어난다.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생명력에 탄복할 뿐이다.

역경은 고난 극복의 단초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고통은 현재적이며 이겨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버텨낼 뿐이다. 고통에 굴복하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다. 고통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이나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당시 경찰에 체포되면 고문이 시작된다. 초기의 고문은 악랄하고 극심하기 때문에 대부분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기밀을 토하고 만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운동 조직은 점조직으로 움직인다. 자신도 상대 연락원의 이름조차 모른다.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 조직의 체계나 상부의 인물도 몰라야 한다. 강령대로 움직이고 행동할 뿐이다. 체포되고 초기 고문이 진행되는 두세 시간이 고비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버티며 도피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거다.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해 토설하고 말지만 이미 주요 거점의 조직원은 잠적한 상태다. 일제강점기 때 노동조합 운동은 황석영의 최근 장편 「철도원 삼대」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조선에서 노조운동을 하며 철저히 일본의 비국민(非國民)이자 평화를 희구한 반도인이었던 이소가야 스에지(磯谷 季次)의 생애는 변은진의 책에 나온다.

산책길에서 눈 맞은 소나무를 보며 고문을 떠올린 건 생뚱맞지만 혹독한 역사적 상황을 버텨낸 앞서간 세대가 생각 나서다. 요순시대처럼 만고 태평의 시절은 흔하지 않다. 我腹旣飽不察奴飢(아복기포 불찰노기)다. 제 배 부르면 종 배고픈 줄 모른다. 좋은 형편이나 좋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남의 딱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 내가 더 가지면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천지 불인(天地不仁)의 냉엄한 현실 세계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의 상상력이 곧 연민과 공감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 며느리가 이쁘면 발꿈치가 달걀 같다고 나무라는 저녁 굶은 시어미를 닮은 무리들과는 동떨어진 감정이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는 세상. '만지지 말고 만나지도 말고 떨어져 살아라'가 삶의 명제로 되어버린 기막힌 현재에 눈 속의 소나무 앞에 고개가 숙여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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