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디올러스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죽기까지 당신을 기억하겠어요. 당신을 죽을 만큼 좋아한 적도 있으니까요. 겨우내 손톱만 한 온기로 몸 데우며 세상에 나갈 날 기다렸지요. 물기라곤 인정 만치도 없는 세상 비쩍 마른 건 세월 만도 아니었어요. 정전기가 튈 만큼 사람들의 거리는 멀어졌지요. 아군의 살점을 노려 정글을 뒤지는 패잔병의 얘기를 아시나요. 서로는 서로를 그리워하다 사냥하기에 이르렀어요. 남은 건 환멸과 분열로 부서진 자아 말고 뭐가 있겠어요. 군자다운 구석이라곤 지지리도 없는 군자란이 꽃대 올릴 무렵 구십을 다 채운 풍기 댁 겨울 털고 마당에 나섰지요. 삶의 끄트머리에서도 봄은 지겹기도 반갑기도 한 모양입니다. 살아 꽃 볼 날 얼마나 되겠냐며 진물 흐르는 눈길 투명한 하늘에 닿습니다. 나도 당신만큼 봄이 그립고 지겹기도 해요. 그래도 당신을 기억하며 삶을 추억하겠어요. 호미로 갈라낸 육신 갈앉으며 새로운 봄을 밀어내겠습니다. 나머진 당신 맘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