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72)

냉동 순댓국을 끓여 고기 건져 한잔했다. 햇반을 데워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배 채우니 오만가지 근심이 사라진다. 중국의 철학자는 '모든 사유의 근본은 위(胃)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먹어야 산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니 끼니를 챙기는 건 생명활동 중 으뜸이다. 시대와 불화한 이단아 허균은 식색본성(食色本性)을 화두로 반상의 구별 없이 친구를 사귀고 여자를 안았다.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 없었다면 역사는 조금치도 나아가지 못했을 거다.

간밤에 내린 빗물과 눈 녹은 물이 모아져 좔좔 소리 내며 흐른다. 면소재지의 강마을이 잔잔하게 펼쳐진 강변의 아래쪽에 기다란 하늘다리가 물길을 가로질러 공중에 떠 있다. 여름에 여자와 다리를 건넜다. 오랜만에 만난 여자는 여전히 젊었고 너그러웠다. 코로나 이후 사업이 고전 중이라고 했다. 다리 건너 숲길을 걸었다. 철 지났는데 풀숲에 산딸기가 소복했다. 여자가 손바닥에 올려준 딸기를 마시듯 먹었다. 시큼한 맛이었다. 훅훅 열기가 끼치는 더운 날이었다. 말수가 줄어든 여자와 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햇발이 들지 않는 산자락엔 잔설이 부옇게 깔렸다. 무논보다 밭이 많은 고장에는 고추, 사과 등이 주요 산물이다. 겨울 강은 마른 몸을 비틀며 군데군데 석얼음을 인 채 신음하듯 꿈틀거린다. 먹이활동이 뜸한 바닥엔 거울 같은 물살이 흔들릴 뿐 물고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산책하는 주민이 힐긋거리며 지나간다.

강변의 정자 위에 텐트 치고 엎드리니 봄 날씨처럼 푹한 기운에 금세라도 풀 싹이 돋아날 것 같은 느낌이다. 전국 어딜 가도 경쟁하듯 길은 곧게 뻗고 공원이 즐비하다. 풍광 좋은 곳에 멈추고 밥 끓이면 그곳이 바로 쉬어가는 자리다. 자전거 타고 울릉도 해안도로를 일주할 때 곳곳에 가로공원과 화장실이 있어 다니기에 편했다. 품고 있는 사연은 각기 달라도 산하는 아름답고 눈물겨웠다. 얼굴에 부딪는 바람, 마시는 공기 한 줌에도 선대의 피눈물이 배어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 갈앉는다.

어둑살이 깔리는 강변에서 술기 올라 기타도 조금 퉁겨본다. 뭐 한다고 서책을 예까지 끌고 와서 살가운 풍광 즐기는데 성가심을 자초하나 싶다. 가만히 움직여도 자잘한 흥분이 일 정도로 호젓한 시간이 기껍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 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라고 썼다. 강돌 위에 앉은 왜가리가 아까부터 굳은 석상처럼 꼼짝 않고 섰다. 녀석은 어둠에 지워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강마을이 불이 들어오고 서둘러 돌아가는 새들의 날갯짓이 고적한 강변의 공기를 휘젓는다. 오늘 밤도 오롯이 나 혼자다.

눅눅한 습기가 자욱한 아침이다.
시간은 많고 서두를 일은 없다. 느릿느릿 일어나 선득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신다. 맑은 물 흐르는 개울이나 콸콸 쏟아지는 수도가 없는 곳에선 물 한 컵으로 세수하고, 한 컵으로 양치질한다. 물 한 방울의 소용이 참으로 소중하다. 정자 아래인데 플라이가 축축하게 젖었다. 통풍구를 열어두고 잤지만 추위는 느낄 틈이 없었다. 침낭 안의 훈기가 식어 핫팩을 흔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새벽 무렵 계곡 쪽에서 고라니 울음소리가 났다. 악쓰듯 울부짖는 소리가 한참 났다. 헤드랜턴을 켜고 텐트 밖으로 목을 내밀고 나서 잠잠해졌다. 서서히 동살이 트기 시작했다.

발열체를 쓰지 않고 가스버너 꺼내 햇반을 데운다. 중탕한 햇반을 바로쿡 도시락에 덜고 끓인 물에 즉석 육개장을 데운다. 육개장에 만 밥을 휘저어 아침을 때웠다. 어제와 달리 아침 운동 나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느릿한 동작으로 짐 챙긴다. 오전에 청량산 지나 안동호 주변으로 돌아볼 생각이다. 해는 나올 낌새 없이 무거운 구름층이 잔뜩 내려앉은 하늘이다. 임연부의 마른풀 속에서 호로록! 새소리가 났다. 밤사이 내가 누운 정자의 뒤편에서 잤던 새였구나 생각하니 가까워진 느낌이다. 짐을 눌러 넣고 배낭 끈을 세게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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