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73)
예안면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간다. 청량산을 중심으로 낙동강이 남으로 물길을 내고 강 좌우로 잔산(殘山)이 늘어서 산자락에 펼쳐진 밭이 농사의 전부다. 강을 빼곤 실처럼 가느단 개울은 장마철 외엔 건천(乾川)이라 사막의 와디(wadi)처럼 마른 물의 흔적만 남아 있다. 가을 걷어간 밭은 육탈 된 뼈대만 남아 황량하기 그지없다. 뽑아내지 않은 옥수숫대가 바람에 서걱댄다. 빈 밭 너머로 산이 이어진 양지뜸엔 산소가 누런 뗏장을 이고 드문드문 자리 잡았다. 길가다 무덤을 보면 비석과 상석의 구조를 눈여겨본다. 봉분이 크고 망두석의 문신상이나 무신상에 돌옷이 비치면 다가가 비문을 읽어본다. 거개가 예전에 벼슬자리를 거친 망자다. 성 씨와 본관을 살피고 나라에서 내린 관직을 보면 망자의 겉으로 드러난 일생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오래전 세거 한 선대가 이룬 업적이 지대하면 사당이나 비각이 있기 마련이고 후손의 삶이 곳곳에 이어지기 마련이다. 선대의 흔적이 인간의 역사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유교 가치관은 뿌리가 깊다. 입신양명은 문자를 익히고 서책을 접할 수 있었던 양반계층의 몫이었고 평민은 지배층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충효는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규범이었으나, 여성의 존재는 철저히 지워졌다. 여성의 규범은 현모양처나 삼종지도, 칠거지악에 국한되었다. 가시적 존재와 불가시적 존재의 경계에 차별이라는 벽이 있다. 유교의 세계관은 오늘에 이어져 전통의 습관이 남아 있는 고장에선 특히 두드러진다. 사상과 이념은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시대가 변하면 바뀌어야 한다. 이념의 유효기간인 셈이다. 과거의 의리와 숭상을 고집하던 숭명, 소중화 사상은 민족 자립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현재는 숭미 집단이 횡행한다. 순종은 칼자루를 일제에 바쳤으며 미국으로 넘어간 칼자루는 여적지 받기를 꺼리는 나라. 대체 남에게 기대 생존을 보장받는 공동체에 자존이란 있는지 의심스럽다.
「생각의 말들」에서 장석훈은 "줏대 있는 생각이란 무엇일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당하는 것이 줏대 있는 생각 아닐까? 태어나서 생명을 부여받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데,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역량에 따라 사람의 삶은 갈린다. 생각도 그러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격과 삶의 격이 천 갈래, 만 갈래 갈린다. 결국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라고 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에 빠지기 쉽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불의한 정권의 참모들이 그랬고 태극기 휘날리는 무리가 그랬다. 가장 최악은 배우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바람직한 건 물론 배우면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의 일생과 역사는 방정식의 구도처럼 정답으로만 치닫진 않는다. 시대의 상황과 조건은 투명하고 거기에 인간의 사상과 의지가 행위를 결정하더라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사건에는 우연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운(運)'이란 걸 믿지 않았다. 운명은 깨고 부수어 나아가는 것이지 정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삶의 고비마다 보이지 않는 '운'이 작용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역사의 '우연성'을 말하는 거다. 양자역학으로도 운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거다. 게놈은 유전자 지도를 읽음으로 개인의 체질적 건강을 해석하는 것이지 운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멩이, 불 켠 듯 나타나는 사랑을 게놈이 어찌 설명할 텐가.
고통은 존재의 현현(顯現)이라고?
주체적 자아 없이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사는 사람이라면 아플 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지만 언제나 맞는 말은 아니다. 고통은 개별적이며 상존한다. 고통은 극복할 수 없으며 버텨낼 뿐이고, 고통이 존재적 상황이라면 인간의 의지와 우연성이 틈입할 것이다.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나를 이해할 사람이 세상에 없다고 느낄 때 외로움에 빠지는 사람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철저히 혼자이고 뿔은 구부러져 있다. '운'이 다하지 않기를 바란다.
청량산의 등짝을 돌아 남으로 길을 타면 외딴 산촌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도시화된 우리나라에 사람이 가보지 않은 오지가 있나 착각할 정도로 고즈넉한 길이다. 등짐을 지고 호젓한 산길을 넘었을 사람을 생각한다. 고향을 버리고 야반도주, 국가의 존망에 목숨을 걸고 의병을 일으키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먹고살기 위해 만주로 떠나는 사람들의 서러운 입김이 밴 길이다. 길가의 얼크러진 칡넝쿨이 일제에 저항한, 독재에 항거한, 불의에 맞서는 세력들과 맥을 같이하는 오늘의 고단한 사람들의 행보에 비해 '너는 대체 무엇이냐'라고 배배꼬인 물음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