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75)
시내로 나가기 전 보건소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혈압과 시력을 재고 피를 뽑았다. 간호사가 내준 시험지 막대에 오줌을 묻혀 내밀었다. '아이고, 당뇨로군요...' 아이고 당뇨라니. 흰 머리카락이 섞인 그녀와 나는 일면식도 없다. 나의 당뇨와 그녀의 삶 또한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아이고라니. 차라리 당뇨군요 했으면 사무적일 터였다. 당뇨이기 때문에 약을 먹으며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 국가에서는 보건정책의 배려로 평균수명을 삼 년 연장시킬 수 있다고 장담한다. 누구 맘대로 개인의 수명을 연장한단 말인가. 행복하다는 보장도 없이 매일같이 쪼그라드는 노인들의 말년을 부풀려 뭐 하겠다는 건가. 젊은이를 걱정한다면서 노인을 계속 살려둘 건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태어난 존재지만 생명에 관한 주체적인 의지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가난과 질병, 고독으로 죽지 못해 사는 노인의 사라질 희망을 짓밟는 행위는 '완벽한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다. 완벽한 삶이 없듯이 완벽한 세상도 없다. 행복의 환상은 죽음이 찾아올수록 실체가 드러나지만 정작 본인은 죽음의 실체를 맞지 못한다.
나는 언젠가 가족을 떠날 생각이다.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혈연 관습적인 아비의 역할에서나 가장의 역할에서 난 떨어져 있다. 아이러니하게 닮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역할'이란 지워진 짐에 불과한데 어정쩡한 자세로 뛰어내리지 못하는 기차의 난간에 매달린 무임승차한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괴로움에 가슴을 쥐어뜯는 것은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마음 놓고 괴로울 수 있는 자유라면 좋겠지만, 그것조차 사치에 불과하다. 인간의 관계란 참으로 끈질긴 것이어서 헤어질 때조차 넥타이의 색깔, 치마의 유행을 따지려 든다.
사십일 년 만에 만난 친구 콘라드에게 퇴역 장군 헨릭은 말한다.
"다 지나간 지금,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을 덮고 집을 나섰다.
돌아보면 원죄와도 같은 실수는 언제나 길을 가로막았고, 그때마다 윤곽이 비치지 않는 길을 더듬어 걸을 뿐이었다. 내게 퇴역 장군의 열정 비슷한 게 존재할까. 어제 해거름 명호 강변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텐트를 쳤다. 플라이를 덮고 가는 로프로 텐트 주위를 빙 둘렀다. 시린 손을 비비며 짐을 텐트 안으로 옮겼다. 숨을 돌릴 참 간헐적으로 불던 골바람이 다시 텐트를 후려치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영하 십오 도 아래 떨어지는 추위는 견딜 수 있지만 이러다 강풍에 텐트가 찢어질 것 같았다.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지나면 어둠이 몰려올 거다. 시간이 급했다. 일껏 친 텐트를 정리할 새도 없이 짐과 함께 차 안에 구겨 넣었다. 급하게 강을 건너며 평다리 위에서 안개등을 켜야 했다. 읍내로 가는 도중 다시 전조등을 켰다. 사위는 어둠에 묻혔다. 내처 시내로 나가 다이소에서 강아지 옷을 사고 집에 돌아오니 발에서 땅거미가 얼음조각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다이소에서 산 '곰돌이' 옷은 작았다. 다음날 라벨과 영수증을 들고 시내로 나갔다
지금은 운동장이라고 할 수 없는 앞뜰은 가지만 남은 수목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요란하게 들끓었다. 그는 함부로 자른 라일락을 가리키며 아직 자라는 중이라고 했다. 난 높다란 전나무 그늘 탓일 거라고 했다. 뜰 한복판에는 어깨가 벌어진 다행송(多行松)이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듯 초록색 바늘잎을 긴장하며 힘주었고 운동장을 침범한 단풍나무는 멍 같은 빛깔의 피부를 하고 하늘로 손을 뻗쳐 들고 있었는데, 벌서는 아이 같았다. 오래전 초등학교 치고 아담한 크기였다. 여기서 자란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떠났을까. 이끼 덮인 전나무는 아이들의 함성을 기억할 것 같았다.
세 칸 규모의 교사(校舍)를 나누어 아뜰리에와 살림집을 꾸몄는데 내외의 성품답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거실 벽에 걸린 그림에 눈길이 갔다. 동해안에서 십오 년을 사는 동안 밤마다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검은 바다의 해안을 따라 허연 이빨을 드러낸 짐승처럼 쉴 새 없이 파도가 모래벌판을 물어뜯고 멀리 어판장, 횟집이 늘어선 읍내의 불빛은 보석처럼 빛났다. 화가는 울릉도 도동항이라고 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비극이라고 한 배우의 말이 생각났다. 어둠과 빛은 서로 대치하면서 존재한다. 화가는 빛의 명암을 질료로 어둠과 빛이 빚어내는 존재의 양태를 그린다. 사과를 그린 정물화 속의 사과는 언제나 싱싱한 빛을 띠고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화되어 서서히 썩어간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금세라도 시큼한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지만, 시간의 흐름을 머릿속으로 덧칠하면 볼품없이 썩어가는 사과를 느낄 수 있을 거다.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귀를 자른 고흐는 그림 속에서 고통을 붕대로 친친 감았지만 얼마 후 피스톨로 자살한다. 젊은 고흐의 얼굴과 자살의 그림자가 겹치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이미지 너머의 진실을 읽으라고 말했다. 현재의 고정된 이미지가 전하는 말은 현재에서만 발화되고 사라질 뿐이다. 어리석게도 인간은 보이는 것만 믿고 모르는 것을 불신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어둠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잉태하지만 빛이라고 진실일 수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어둠보다 빛 쪽이 의혹을 내포한다. 어등(漁燈)의 불빛을 좇아간 것들의 결말은 새하얀 죽음이었다. 모오든 빛을 의심하라! 세상의 가치 또한 그렇다. 섭생의 끈질긴 순환에서 인간은 더 높은 경지를 탐닉한다.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 좀 더 큰 차, 더 높은 사회적 위치를 행복의 조건으로 친다. 자본은 줄기차게 소비를 부추기고 급기야 존재의 명분은 '소비하는 동물'로 되어버린다.
작품을 보관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슬라브 옥상에 지붕을 씌웠는데 꽤 넓은 공간이었다. 난방이 들지 않아 발이 시리다. 크고 작은 크기의 작품이 사방에 포개져 있다. 집 주변 곳곳에 갈색으로 쌓인 낙엽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