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76)

추워진다는 예보는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다. 문경으로 내려가는 길은 일로 순풍(一路順風)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는 거미줄처럼 마을을 잇고 쭉쭉 뻗어 나간다. 작년 겨울에 내려간 남쪽 바다. 수제비 같이 둥둥 떠 있는 섬들을 뻘밭에 기둥을 세워 현수교로 연결했다. 갑자기 생활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창에 생선을 모았다가 배에 실어 공판장이 있는 육지로 나가지 않아도 됐으며, 파도를 걱정해 배를 띄울지 말지 발을 구르지 않아도 되었다. 물풍한 갯것들을 뭍으로 나르고 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물에서 나오자마자 좌판을 벌였고 육지사람들은 깔깔대며 소라를 씹었다. 살림은 불었고 여자들의 잔소리가 줄었다. 코로나가 점령군처럼 인간의 마을을 덮칠 때까지는.

역마살을 계급장처럼 달고 살 적엔 경운기를 몰고 남도 들녘을 누비며 고물을 샀다. 종일 노햇마을을 쏘다니며 보리밭 김매듯 고물을 솎아내면 해거름 무렵엔 경운기 짐칸에 산더미처럼 남도의 얘기가 쌓였다. 엿판을 메고 가위를 치며 구수한 남도 사투리에 정 깊은 사람들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곰팡이 핀 고서적을 들춰내고 뒤란을 돌아가면 세월의 녹이 앉은 보습이며 재봉틀 다리가 쏟아졌다. 오뉴월 보리누름에는 까끌한 타작 마당에서 막걸리와 들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시집살이 맵디 매워 보릿철이면 고만 딱 독사에게 손가락 물렸으면 좋겠다는 할매의 넋두리를 들으며 짭조름한 해풍에 코를 벌름거렸다. 팔십 년 오월의 난리가 지난 남도의 바람은 딱딱하게 굳었고, 사람들의 가슴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썩어 문드러진 좁은 나라의 위아래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시대의 결기 하나로 청춘을 불사른 아나키스트의 생가에 갔다. 오래된 그의 연인 가네코는 겨울 햇살을 눈부시게 안고 누웠다. 더럽게도 불운한 생명을 지고 태어나서 식민의 땅 조선의 청년을 만나 한 점 미련 없이 살다 간 그녀의 영혼은 시댁 동네의 뒷산 양지머리에서 안식을 찾았을까. 남자는 북녘 땅에서 생을 마쳤다. 일찌감치 생과 사가 갈린 마당에 미련이야 남을까 마는 지방자치 정부는 납북이라는 종이 한 장 이념의 저울로 불온한 무정부주의자의 삶의 흔적을 목청껏 알리고 있었다. 생각하건대 당시를 뜨거운 입김으로 살았던 그를 만나고 싶은 거다. 구름 사이로 달빛 숨은 밤 싸리울 너머 고향집 사랑방에서 선 굵은 그의 표정에 기대 우렁한 그의 말소리에 귀 담고 싶었다.

아, 나는 얼마나 밋밋하냐. 난 얼마나 개 같으냐. 뜨거운 연애는커녕 무엇 하나 몸 바쳐 쓰러지지 못한 나는 얼마나 초라하냐. 뾰족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친 개울가엔 어김없이 모텔 캠핑장이 들어섰고 물 샐 틈 없이 쾌락의 울타리가 들개의 출입조차 막아선다.

꼬불꼬불 시골길 달려 내가 태어나기 백 년 전에 태어난 의병대장의 집으로 간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의 눈에 비친 세상은 반역과 모멸의 미친바람이 몰아치는 암흑의 광야. 도포자락 펄럭이며 창의(唱義)한 선비의 기개는 주구에 빌붙은 목숨을 시퍼런 칼날 아래 도륙했다. 찢어 죽이고 매달아 죽여도 매국의 무리는 시궁쥐 새끼 치듯 곰비임비 불어났다. 그것들이 오늘에 이른 건 새삼 말해 무엇하랴. 사람 살기 좋은 세상 만든다는 데에 반상의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전국의 의병은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13도 의병이 연합하여 양주(陽州)에 집결했다. 영덕에서 창의한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양주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병 재편 과정에서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당시 의병은 양반이나 유생 출신이 주로 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전국 의병 연합은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서울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송경동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 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길을 파고들어 이념을 갈아탄 이들이 끝내 이루려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복벽(復辟)으로, 아나키즘으로, 사회주의로 생각은 달라도 독립의 열망은 하나였다. 시대 상황의 조건은 당대의 인간을 각성시킨다. 인간은 의지는 그가 학습한 대로의 가치를 세워 사건의 회복을 꿈꾼다. 왕조 시대는 복벽파가 의당 왕의 귀환을 꿈꾸지만 노비첩을 불태우고 가옥과 전답을 팔아 가족, 아이 밴 며느리와 따르는 식솔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나라 잃은 설움은 어떠했을까. 무관학교를 세우고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는 동안 나라를 되찾으려 애쓰던 사람들은 굶어 죽고 병들거나 감옥에서 죽어갔다. 왕이 어리석고 미워도 내 땅에서 죽이 되든 밥을 끓일 일이고, 백성 중에서 대표를 고르거나 그도 아니면 국가든 무엇이든 일체의 권력의 지배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를 누리든 그들의 목표는 가난한 내 집에서 발 뻗고 먹고사는 거였다. 지금이라고 무엇이 다를까만.

문경의 개울가에서 한둔하려던 계획은 우습게도 물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의병대장의 집 앞에서 라면밥을 데워 점심을 때웠는데 물통의 물을 채우지 않은 걸 알았다. 차를 뒤져 남은 생수를 꺼내 발열체를 데웠다. 가온 읍 공원 화장실에서 물을 받으면 되지만 요즘 수도꼭지는 죄다 납작하고 세면대에 붙어 물통에 물을 담기는 불가능했다. 자잘한 머릿속으로 기구를 착안했지만 재료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겨울이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부는 날에는 모든 집의 문은 꽁꽁 닫아둔다. 집에 돌아갈 핑곗거리를 또 찾았다. 지역별 리스트를 만드는 일이다. 일 중간중간 톺아볼 역사의 흔적을 나만의 리스트를 정리하는 일이다. 무엇을 이룬다는 생각은 없다. 가다 끝나면 멈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세포분열이 빠르게 일어났다면 십 년 전의 나를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서서히 시든다. 길 가다 마주친 동창의 얼굴에서 주름 너머의 오래된 얼굴을 불러낸다. 몸이 그러하다면 정신은 어떠한가. 물론 생각도 어제와 난 다르다. 생각이 같다면 죽은 나무토막과 같다. 어딘가 살아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뇌는 눈물을 흘리지 못할 거다. 정신을 불러내는 몸이 죽으면 생각의 촛불도 꺼진다. 삶의 재와 부스러기를 치우는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도 언젠가는 재로 날아간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함으로 사유한다'가 맞다. 낮은 온도의 앎을 경계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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