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는 물질이나 나이의 총량이 아니다. 그럼에도 부자로 오래 사는 걸 원한다. 백세시대는 누구나 씹는 달콤한 껌이 되었다.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선대는 생존을 위해 고생스러운 삶을 버텨냈다. 그러다 보니 가난 탈출이 목표요, 자갈논 팔아서 학벌을 쌓아 입신양명하는 게 꿈이었다. 군사독재를 숨죽이며 살아온 대중의 바람은 민주화된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으로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풍족한 삶을 누리는 수준에 도달했는데 허전함은 삶의 도처에 널브러졌다.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결과다. 채워도 채워도 늘 부족하다. 황소 흉내 내는 개구리가 되었다.
석천계곡에 갔다. 지금은 물길 따라 위아래로 길이 넓게 뚫려 있지만 예전에 석천정사로 가는 길은 오솔길이었다. 입시 공부하는 양반의 자제들이 꿈을 안고 드나들었을 거다. 성리학의 가치관과 신분계층의 단단한 구조가 하늘과 땅을 떠받치고 있었던 세상에는 입신과 출세가 지상의 당면 과제였을 터다. 물가로 발길이 오르내려 바위가 반질반질하다. 물살이 쓸고 간 닳아짐도 한몫했을 거다. 물 따라 기름한 하늘이 보인다. 개버들의 솜털이 부슬하게 일어서고 물길을 덮을 듯 촘촘한 소나무가 새뜻한 초록빛이다. 조금 전 계곡 입구를 지나면서 정자 위쪽 밭에서 남자 둘이 밭 가는 걸 보았다. 사람이 끄는 손쟁기로 밭을 가는 사내들의 표정이 흙빛이란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무얼 심어 돈으로 바꿀까. 입성이며 표정이 농사를 천직으로 삼는 사람들 같지 않고 억지로 연출된 풍경처럼 느껴졌다. 내 쪽을 흘깃 쳐다보는 표정에서도 어색함이 뚝뚝 떨어졌다.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사는 게 요즘 사람들 같다. 조선 시대라면 신분에 따라 인생의 목적이 정해졌을 거지만, 근대의 시민은 물질과 안온한 삶이면 최고의 만족일까. 길에서 돌을 하나 집어 들어도 타인의 시선과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완벽한 몸과 정신의 평화를 말하는 건 불편한 일이다. 기우듬한 현실에서 미치지 않은 척 살아가는 게 현명한가. 앎도 모름도 팽개치고 한 길로 달린다면 그닥 걱정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추위가 온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의 봄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 얼었던 땅 풀리고 죽은 가지에서 물 오르고 연초록 싹 오른다. 들판은 점령군과 같이 동시다발로 초록 불붙어 타오른다. 묵은 농기구의 먼지 털고 등 떠밀려서라도 들에 나가 흙 뒤집는다. 그걸 자연의 이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봄은 민주적이지 않다. 햇발은 뒤란이며 골짜기며 골고루 핥아주지만 언 땅은 사시사철 언 채로다. 녹지 않는 사유의 봄은 멀어도 한참 멀다. 현인은 그걸 천지 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생성과 사멸을 반복할 뿐이지 목적과 희망은 없다. 인간의 다양한 해석으로 인식할 뿐, 생태는 인간의 사정에 쌀쌀하리만치 무심하게 되풀이한다.
인간의 마을을 휩쓰는 바이러스 하나에도 갖은 해석을 붙이며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고 상대를 헐뜯는다. 비난이라면 모르겠으나 죽어라 물어뜯는다. 일본 총리가 '자꾸 역사를 들춰내는 한국과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라고 한다. 역사 없이 역사가 이루어지나. 자신에게 불편한 과거는 숨기자는 심산이다. 타인을 침략, 약탈, 강간, 학살한 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나라는 전망이 없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벌레처럼 다시 재무장을 꿈꾼다면 이번에는 섬나라 전체가 침몰할 것이다. 일본의 수구는 과거의 복원을 꿈꾼다. 이차대전 후 일본의 시민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전범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국민이 구 할을 넘었다. 그런 난센스 한 파격적인 심리를 가진 국민이다. 두 번 속으면 회생이 불가하다. 개인도 탄백(坦白)하지 못하는데 저것들은 벌건 하늘을 뒤집으려 날뛴다. 폭력과 전쟁을 미화하는 나라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백기완 선생이 죽었다. 한 분 한 분 이 땅의 어른들이 사라진다. 오래전 선생의 강연을 들으러 인천에 갔다가 아내를 만났다. 선생은 마음속의 지주이고 스승이다.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외치는 거친 음성을 언제 다시 들을 수 있나. 서로 나누며 '제대로 잘 살아야'한다는 말씀을 늘 새기는데 여적지 '제대로'에서 미욱한 걸음새다. 선생은 저승에서도 통일을 꿈꾸실 거다. 마지막 자전 소설인 '버선발 이야기'를 읽은 게 가뭇하다. 통 큰 어른의 상실은 우리의 슬픔이다. 그곳에서 아프지 마시고 안식에 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