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79)

역사로부터 무관한 가계는 없을 거다.
한 세대를 삼십 년으로 치면 삼대는 백 년에 이른다. 나로부터 백 년 전의 역사는 할아버지 대가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한 시절일 거다. 어렸을 때 국사를 배우면서 삼국시대의 고대사를 알았다. 하지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빗살무늬토기와 삼국통일, 고려의 왕건과 조선시대의 태종 태세 문단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는 둘째 치고, 역사에 대한 비판과 교훈의 의미는 생각할 틈 없이 연대기를 외는 고역스런 학습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역사는 외는 게 아니라 알아가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건 머리 굵어지면서부터였다. 족친의 피바람을 부르는 왕조의 역사를 꿰면서 수많은 민중의 피울음이 산하의 숨통을 이어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구한말 봉건제와 개화파의 실타래처럼 엉킨 정국에서 무능한 군주와 양반 관리의 가렴주구는 한 치의 앞길도 비추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아가리 속으로 대가릴 디밀고 말았다는 엄연한 역사의 현장을 엿보기 시작했다. 외부세력의 먹잇감으로, 냉전의 역학 구도에서 세력 간 긴장의 다툼은 불운한 강토의 운명임을 깨달았다. 불행히도 백여 년 전의 상황은 오늘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항일 독립운동의 결기는 해방 후 좌우익의 분열로, 한국전쟁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민주화와 노동운동, 인권 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형성했다는 거에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갖게 했다.

시대의 사상과 이념은 실천이 담보될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 구두선으로서의 외침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으며 민중의 피눈물을 씻어내지 못한다. 모래알로서의 나는 모래알일 수밖에 없지만 물길의 쓸림에 따라 요동치고 흘러가 모래톱을 만들고 그대로 물살에 섞여 바다에 가든지 모래알의 존재를 이어간다. 바위와 거센 물살, 얕은 여울을 지나 시간의 흐름에 섞이는 건 인류의 역사와도 닮은 데가 있다. 역사는 시대적 상황과 조건, 인간의 의지와 우연성이 만들어 내는 삶의 흔적이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의병 투쟁을 했고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군사독재에 저항해 민주화 운동을 했다.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해 노동운동을 했으며 불합리한 체제에 저항해 소수의 목소리는 물방울을 모아 급류를 만들 듯 거센 흐름을 이었다. 인권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바탕으로 한 치도 미루거나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삶에서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낸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남의 일처럼 외면하거나, 독재의 무리에 침묵을 지키는 것 또한 암묵적 동조 이리라. 적극적 친일파를 솎아내 단죄하자는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세력은 정치, 군과 경찰을 쥐어 틀고 뿌리를 이어갔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김금덕은 나의 고모할머니다.
할아버지의 누이동생인 고모할머니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불광동에 사셨는데 이웃한 동네에 살던 삼 형제가 세배를 간 적이 있다. 중학생인 나는 화조가 그려진 병풍을 등지고 앉은 고모할머니가 무섭게 느껴졌다. 궁궐에서 사신 분이라고 들었으나 고모할머니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었다. '네가 해종이 아들이냐' 묵직한 어조로 그러나 애써 다정함을 풍기려는 듯한 음성에 안 그래도 무서웠던 탓에 그만 기죽고 말았다. '이리 오너라'해서 다가갔더니 빳빳한 오백 원짜리 지폐를 한 장 쥐어주었다. 예전에 고모할머니를 모시던 분이 강원도서 숯을 보내주어 난방을 한다고 들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일간지에 실린 고모할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집안 분위기 탓인지 어른들은 명절 때 찾아가도 집안 얘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사촌들과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명절 때 오고 가며 놀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큰아버지의 선언에 각자 집에서 명절을 쇴다. 나이 들어 막내 고모에게 집안 얘기를 단편적으로 듣다 고모부가 죽자 고모는 미국에 사는 외동딸 집으로 보따리 부치고 아예 건너갔다. 가끔 페이스북으로 고모의 근황을 듣는다. 책을 읽다 고모할머니의 행적을 본 적이 있다. 네이버 검색을 하면 의친왕과 딸인 이해경 여사의 얘기가 연결되어 찾아보았다.

김금덕(金今德, 1909년- 1975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여성 운동가이며, 유치원 보육교사, 대한제국의 황자 의친왕의 후궁이었다. 의친왕에게 대들다가 사동궁에서 쫓겨난 뒤, 유치원 교사로 활동했고 정치,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해방 후 1948년 제1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전 제1선거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경성 보육학교(京城保育學校)를 나와 유치원 보육교사로 활동했고, 한때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취직했다. 일제 강점기 초반, 그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활동 중에 의친왕을 만나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의친왕의 후궁이 되어 이해경 등을 낳았다. 당시 의친왕은 독립군에 가담하려다가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발각되어 강제 은퇴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의친왕의 배려로 궁 안의 보육교사로 취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친왕에게 대들다 출궁 당해 쫓겨났지만 재혼하고 사회활동을 했다.
해방 후 여성으로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48년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김금덕은 대전 제1선거구에서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말을 타고 장터를 돌며 선거활동을 하다 동네 노인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고 했다. 선거는 모두 낙방했다.

의친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김금덕의 딸 이해경(李海瓊, 황실명: 이공, 아명: 이길상, 1930년 ~ )은 대한제국의 황자 의친왕의 다섯 번째 딸이자, 고종의 손녀이다. 이우, 이건의 이복 여동생이자 '비둘기집'으로 알려진 가수 이석의 이복 누나이다.

소녀 이해경은 경성유치원을 나와, 경성 여자 사범부속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유치원은 덕혜 옹주를 위해 고종 황제가 덕수궁 안에 세웠던 유치원으로, 해경은 이완용의 손녀딸 등과 함께 그곳을 다녔다.

그녀는 성악가 겸 뮤지컬 배우와 음악가 겸 저술가 활동을 하였고 미국 뉴욕 주 뉴욕 시티에 주로 거주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아버지 의친왕과 생모 김금덕과 적모 덕인당 김수덕이 있었고 직계 친척 관계는 이복 언니 이해원, 이복 남동생 이갑, 이석, 사촌 오빠 이구, 이복 조카 이원 등이 있다.
그녀는 세 살 때부터 생모 김금덕과 떨어져 사동궁에서 의친왕비 김 씨와 살았다.

1949년 서울 경기여고를 나와, 1953년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했다. 이화여대 야간학반을 다니며 서울 풍문여고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 주한 미 8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일했으며, 이것이 훗날 사서를 하게 된 계기가 된다.
집안이 몰락해 가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5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텍사스 메리 하딘 베일러 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였고 1959년에 이 학교를 음악학 석사 졸업했다. 비록 계속 성악가의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1973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가지고, 1985년 테너 이인선 추모음악회로 국내 무대에 선 바 있다. 1969년부터 뉴욕 컬럼비아대 동양학 도서관 한국학 사서로 일하다, 1996년 과장으로 정년퇴직했다. 독신으로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현재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 자문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고은의 만인보 중 <1903 김금덕 편>이다.

'대전 성남장 시절 만났다.

부통령 함태영
국회의장
및 장관 국장
편집국장
은행 총재 등
서울 명사 3백여 인이
이 방 저 방에 수용되었다

성남장 주인 김금덕 여사
이때 맞이하려고
우리 여관 객실 40실 도배했던가

벌써 인민군은
서울을 차지했고
수원이 내일모레 떨어질 판

대지 3천 평 건평 170평에
별의별 인사 다 들어찼다

백낙준 김석원 이범석 신익회
장기영 김유택 장경근 이선근
지성천 신태영 조병옥 최독견
신성모 등

밥상에는 으레 반주 주전자가 따랐다
하루에 쌀 다섯 가마
이시영은 밥과 국 열무김치와 된장찌개만 두고
나머지 반찬을
빈 소반에 남겼다
김석원 장군은
320명 의용군을 招募(초모)하여
예편이었다가
수도사단 단장 현역으로 되었다
충남 갑부 김갑순도 의용군 지원금 댄다고 나섰다

그런 중에
누군가가 대한민국 인사 1만 명만 골라
일본으로 도망칠 배를 사자는 모의도 있었다

여관 주인 여장부 김금덕 여사가
그들의 모의에 들이닥쳐
꾸짖기를

당장 내 집에서 나가주시오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망치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줄 아시오

성남장 주인
배포 큰 아낙이더라
연민도 크고
분노도 큰 아낙이더라

이시영 옹 떠날 때 애틋하게 사모하기를
저런 어른 한번 모시고 살아보았으면...'

막내 고모에게 들었던 얘기에 따르면 고모할머니는 여장부였다. 궁궐에서 의친왕에게 대들었다가 각서를 써주어 내보냈다고 한다. 이후 만주에서 큰돈을 번 상인과 재혼했으나 남자는 곧 죽었단다. 대전의 99칸짜리 한옥을 개조해 여관을 운영했다. 한국전쟁 전에는 말을 타고 의원 선거에 두 번 출마했으나 모두 떨어졌다. 마산 출신의 여장군 김명시가 떠올랐다. 항일 독립 장군 김명시나 김금덕, 우리 집안은 김녕 김 씨다. 고모할머니가 의친왕에게 대든 이유가 궁금했다. 의친왕은 1919년 임시정부의 추대로 비밀리에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려고 일경의 감시를 피해 의주행 기차를 탔다가 중국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붙잡혔다. 조선 왕조에서 유일하게 일제에 저항한 사건이다. 의친왕은 일본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자손을 많이 두어야 한다고 했으며 실제로 스무 명이 넘는 자식을 두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정실 외에 후실을 얼마나 두었는지 짐작이 간다. 이승만은 같은 전주 이 씨였지만 대통령이 된 후 왕실을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살던 영친왕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고 군사정권이 들어선 1963년에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병자의 몸으로. 인용한 시는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간 정부 인사들이 대전에 피난 와서 다시 남쪽으로 떠나려 할 때 고모할머니가 지프차를 가로막으며 뱉은 말이다.

고모할머니에 대해 아는 거라곤 네이버 검색과 역사서에서 한두 장 기록된 것 외엔 막내 고모에게 들은 게 전부다. 난 역사의 흐름에서 집안 선대의 역할에 대해 목마를 정도로 호기심이 일진 않는다. 다만 당시를 살았던 선대의 행적에서 고난을 무릅쓴 숨결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일제가 이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던 시인이나 일본에 빌붙어 황국신민이 되길 독려했던 수많은 문인과 인사들, 반면에 만리타국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을 위해 저항하다 한 줌 재로 사라진 선대의 뜨거운 입김에 아연할 뿐이다. 큰아버지 중 한 분은 어릴 적부터 파일럿이 꿈이었다. 일제의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날며 대동아공영을 실현하는 청춘이고 싶었다. 결국 그분은 비행학교에 들어갔고 마지막 출격에서 현해탄에서 사라졌다. 군국주의 교육이 청춘을 허망한 죽음으로 몰아갔다. 또 한 분은 한국전쟁 때 미군 통역장교를 했으며 아버지도 학도병으로 참전해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임관했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일반 대중은 삶의 최고의 목표를 찾아 젊음을 불살랐거나 시대가 떠미는 대로 움직였을 거다. 사학과를 나온 사촌 형은 집안의 역사를 톺아보다 두 손 들고 말았다며 별 볼 일 없는 집안이라고 탄식했다. 별 볼 일이건 볼일이건 무슨 상관인가. 일제강점기 때 바이올린을 전공한 할아버지는 누이가 가마를 보내면 궁궐에 들어가 누이를 만났다고 한다. 강토를 침탈해 피바다를 부른 시대에 서양 옷을 입고 가마 타고 궁에 들어갔다. 적극적 친일이나 소극적 친일이냐를 따지기 전에 따듯한 밥숟갈을 들기가 부끄러운 세상이었다.

어쨌거나 선대는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체험한 세대다. 나는 선대를 거쳐 베이비부머로 태어났고 4•19와 5•16, 군사독재와 광주항쟁을 겪었다. 다시금 깨닫는다. 역사는 시대인식과 그것을 성찰하는 인간의 의식, 그리고 사건이 겹치는 우연성의 결과라는 것을. 분명한 것은 역사의 과오를 심판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실수는 되풀이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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