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고춧대, 웃자란 사과나무 사이 파릇한 싹 찾아 땅에 대고 킁킁대는 개처럼 골짜기 헤맨다. 산불 맞춤한 봄바람 벌써 산 몇 개 잡아먹었단 소식이 바람 타고 넘어온다. 난짝 엎드려 코제트로 겨울 난 냉이는 음력 대보름 전까지 먹어야 제맛이다. 아내와 이웃 아주머니는 호미 들고 자락 밭 구석구석 샅샅이 훑는다. 난 곰돌이의 줄을 풀어놓고 따라다닌다. 태어난 지 석 달 된 강아지는 세상 모든 게 신기하다. 마른 나뭇가지를 물어보고 밑동만 남은 들깨 대궁을 깨문다. 비탈진 밭둑의 위아래를 뛰어다니다 코를 벌름대며 바람 냄새를 맡기도 한다. 바람 끝이 훈훈한 게 봄이 오는 느낌이 든다. 주인 떠난 빈 과수원의 사과나무 웃자란 가지가 파란색 도화지 같은 하늘 위로 흔들린다.
두엄 더미 근처의 그늘진 땅은 파보면 아직 얼었다. 양지쪽 환한 곳을 파면 포실한 흙밥이 쌀밥처럼 일어난다. 냉이 속새 나물 버금자리 파릇한 봄풀이 눈에 띄지만 예년만 못하다. 작년에 지천이었던 냉이 밭이 올핸 흉작이다. 식물의 천이와 마찬가지로 작물 외로 분류되는 들풀의 경우도 한 해가 다르다. 바람에 날려온 풀씨의 세력이 해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포의 빈도가 눈에 띄게 차이 나는 건 제초제의 사용 탓이다. 밭 터서리로 무성하게 자라는 풀을 낫이나 예초기로 베기보다. 간단히 제초제를 뿌려 싹 잡아 죽이는 농사의 편리가 여타 식물의 숨통을 끊는 거다. 들길의 식생도 차츰 변해간다. 농약을 쳐도 살아나는 질긴 생명력의 애기똥풀은 이제 봄날 들판의 진풍경이다. 생약명이 백굴채인 애기똥풀은 줄기를 꺾으면 애기 똥과 같은 황금색의 진액이 나온다. 독풀이므로 한약에서는 조심해서 쓴다. 봄날 여기저기 노란 꽃을 흐벅지게 피우고 여린 줄기를 하늘대는 풍경은 별천지를 연출한다. 하지만 들판을 점령하는 단일한 종류보다 다양한 식생이 섞인 생태가 건강하다. 단일 수종으로의 식생보다 혼효림, 천연림은 건강하다. 전쟁과 땔감으로 산을 박박 긁어 민둥산이 된 산림을 녹화하기 위해 오륙십 년 전 낙엽송, 잣나무, 리기다소나무 등을 마구 심었다. 덕분에 숲은 푸름을 갖췄는데 침엽수 위주의 임상은 산불에 약하다. 서로 보완, 경쟁하고 길항하는 자연의 생명이란 인간의 마을과도 닮은 데가 있으나 먹을 수 있는 봄나물은 갈수록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다. 생태의 양극화인가.
선돌마을 골짜기에서 몇 낱의 냉이를 캐고 축서사 가는 장수마을로 갔다. 읍내를 관통해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소백산 자락을 바라보며 달렸다. 해발 고도가 높을수록 사과나무 밭이 늘었고 올라간 기온에 전지 하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평지보다 논은 드물고 밭이 많은 동네다. 문수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내성천을 이뤄 남으로 내달리는 시작점이다. 길가에 소나무와 정자가 개울을 끼고 아늑하게 쉼터를 이루고 있다. 기회 되면 텐트 갖고 와 한둔하기로 점찍어둔 곳이다. 두 여자가 미나리 하우스 초입의 콩밭에 들어가 탐색하기 시작한다. 개울에 내려가 곰돌이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낙엽이 물 바닥에 쌓였다. 한여름에 개울물은 얼음처럼 차다. 갈증이 가신 강아지가 밭으로 뛰어가 아줌마가 던져준 냉이를 씹어 먹는다. 무엇이든 입으로 가져가는 아기나 강아지나 닮았다. 밭두렁 구석에서 졸졸 샘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겨우내 좀 쑤신 농부가 사다리에 올라가 똑똑 전지를 한다. 지금도 들판은 병들고 신음한다. 농사를 지어 돈을 사려면 농약과 비료, 퇴비는 필수다. 하지만 무분별한 살포와 남용은 산천을 병들게 한다. 물속의 벌레나 고기가 줄어들면 날아오는 새도 줄어든다. 예부터 연비어약(鳶飛魚躍)은 생태의 축복을 의미했다. 새가 날고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자연은 사람도 살 수 있는 환경이다.
지구는 자멸하는 길로 조금씩 움직이지만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마음이다. '조화로운 삶'의 헬렌과 스콧 니어링의 성찰이 그립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은, 미국이 일차 대전을 치르고 대공황의 늪으로 빠져들면서 모두의 안전을 위협하는 1930년대 뉴욕을 떠나 버몬트의 작은 시골로 들어간다. 자연 속에서 서로 돕고 기대며, 자유로운 시간을 실컷 누리면서 저마다 좋은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삶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원칙을 세운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적어도 절반 넘게 자급자족한다. 스스로 땀 흘려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양식을 장만한다. 그럼으로써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에서 할 수 있는 한 벗어난다. 돈을 모으지 않는다. 따라서 한 해를 살기에 충분할 만큼 노동을 하고 양식을 모았다면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 되도록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일을 해낸다. 집짐승을 기르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사회주의자였던 스콧 니어링이 현재에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전망을 말할까.
개발과 발전이란 명제로부터 조금 떨어져 생태와 인류의 공존을 위한 대안은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계절이 바뀌면 수목은 하던 대로 꽃을 피우고 새를 부르지만 보이는 대로 목가적이지만은 아닌 게 현실이다. 식량은 먹고 남는데도 지구 상에는 수억의 인류가 영양실조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 다국적 기업의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정작 땅이 있는데도 곡물을 수입해야 하는 가난한 나라들.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으로 최초의 식량특별조사관을 지낸 장 지글러는 전 세계를 잠식한 자본주의의 이면을, 세계 곳곳의 충격적인 기아 실태를 고발했다. 흔히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역사 이래 최대 풍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부자들이 백화점에서 명품 쇼핑에 혈안이 된 사이 지구 어디선가는 5초에 한 명씩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죽어 간다. 불평등의 현실이 더 명징해졌지만, 각국 정부는 불평등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전쟁은 그치지 않는데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인류.
멀리서 보니 두 여자의 나물 보따리가 불룩하다. 물길 사이로 무성한 갈대가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나부낀다. 슬슬 집으로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