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感 (4)
안식월의 두 달이 끝나간다.
시간은 나보다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서 늘 뒤처지는 느낌이다. 작년 이 월에 만들어놓은 국제 운전면허증은 기간이 지나 휴지가 되었다. 오키나와에 가려던 계획은 미루어진 게 아니라 꿈이 되고 말 참이다. 여행사가 연거푸 쓰러지고 문 닫을 만큼 코로나 19의 파도는 거세다. 앞으로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는 여행은 머나먼 추억이 될 것이다. 일상의 패러다임은 뿌리째 흔들리고 외출복 주머니마다 마스크를 넣고 살게 되었다. 비대면과 재택근무가 늘어나면 기존의 직업이 사라지고 다른 업종이 뜨는 미래가 현실이 된다. 얼마 후라고 느슨하게 가늠하던 일이 앞당겨진다.
두 달 동안 남도와 경북 일대를 빠르게 훑고 다녔다. 물가에서 겨울 침낭 속에 들어가 핫팩을 비벼 넣고 별을 헤며 잤다. 그러다 시간이 남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보고 싶었던 지인을 찾아 나섰다. 다음 달부터 기간제 일을 시작하면 당분간 시간 내기도 힘들어질 것 같단 생각에서다. 충청도의 동생을 만나고 주문진에 갔다. 주문진 바닷가에서 십오 년을 살았다.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출렁이는 파도는 다름없는데 세상 저문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나눈 얘기, 함께 밥을 뜨고 술을 비웠던 여름밤이 스쳐갔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기억하는 사람의 가슴만 뜨겁다. 코로나에 떠밀려 감옥 같은 방에서 꼼짝 않는다는 구십칠 세의 눈귀 총명한 이웃 할머니를 만나고 오대산 아래서 푸실푸실 웃으며 항암 치료하는 지인과 남은 인생을 점쳤다. 소백산 자락에서 연못 파고 커피 내리다 강릉 노햇마을로 이사 간 형님 내외와 바다 보며 회와 소주를 마셨다. 만나고 헤어지며 다음을 기약하지만 다음은 언제나 남은 자의 몫이란 걸 안다. 다음날 새벽 고양이 걸음으로 초당 동네를 나와 터널로 이어진 길을 타고 경기 북부로 올라갔다. 친구 집 마당의 소나무를 다듬어주고 머리 맞대고 순대국밥을 먹었다. 살다 보면 생각은 있어도 못하는 일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은 하면서 살기로 했다. 몸은 고단해도 먼길 돌아 반가운 얼굴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르다.
떠나기 전 군청에서 근로계약서를 쓰고 받아온 근무복과 신발을 꺼냈다. 옷에서 새물내가 나고 신발에선 고무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산불감시원과 휴양림 관리인을 거쳐 '감염목 무단이동 단속초소 근무원'이란 긴 이름의 기간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름 속에 일의 범위가 확실하게 보인다. 재선충병은 솔수염 하늘소의 몸에 기생하는 재선충의 감염으로 소나무가 고사하는 치명적인 수목병이다. 허가받지 않은 소나무류의 무단 반출을 단속하는 것이다. 몇 해 전 제주도에 갔을 때 한라산 자락의 솔숲에서 벌겋게 말라죽은 소나무를 많이 보았고, 자전거 여행으로 기차 타고 안동을 지나갈 때도 군데군데 방수포로 덮어놓은 소나무 무덤을 보았다. 재선충병이 북상 중이다. 병해충은 산림과 인간에게도 동시다발로 벌어진다. 견디고 버텨내고 살아남는 일이 남았다.
빌린 책을 떼기 전 도서관에서 희망도서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이틀 미룬 외국어 공부를 하고 책을 받으러 가야겠다. 햇살을 끼얹은 마당에는 묻어온 여행의 기억이 꾸덕하게 말라간다. 텃밭에 뿌린 상추 씨는 잠을 털고 일어날까. 더럽게도 봄은 기어이 오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