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개 3년에 풍월을 한다(堂狗三年吠風月)'는 무식쟁이라도 유식한 사람과 사귀면 견문이 넓어진다는 뜻이다. 견문을 요즘 표현으로 치면 인식의 폭이 넓어진다는 정도겠다. 결국 앎의 온도차는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는 기본 척도 이리라. 예전처럼 견문이 넓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개인 생활이 일상화되었다. sns를 통해 정보와 공감을 나누는 게 더 편하다.
지식을 쌓아 성찰을 얻는 데는 독서가 으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개인에 따라 방법은 다양하다. 나는 경험을 통해 삶의 무늬를 더디게 새기며 살아왔지만 생각의 체계와 더 깊은 사유로의 단련을 채찍질한 건 책이었다. 여적지 얕은 여울물 소리를 내며 흘러가지만 책은 내게 앎의 갈증과 깨달음의 물 바가지 같은 거였다. 서당 개처럼 글 외는 서당에 들라는 게 아니라 책을 가까이하는 걸 권하고 싶다. '덮어논 책은 남의 책과 같다'거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아포리즘이 아니더라도 책이 주는 유익은 깊고 서늘하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All history is contemporary history."라고 한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은 유효하다. 과거를 톺아봄으로써 현재를 바꿀 수는 있지만 과거를 바꿔서 현재를 세울 순 없는 일이다. 과거는 지나간 일이지만 과거의 사실에 대한 진실을 갈파하는 자가 현실을 제대로 읽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인식체계)을 깨는 행위가 필요하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맨날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뿐이다. 이미 간 길은 흔적이 남은 손쉬운 길이다. 명나라 이탁오의 말처럼 짖는 개를 따라 짖는다면 죽을 때까지 껍질 속의 알일 뿐이다. 일상의 삶과 역사의 차이는 순환과 사건의 차이다. 범박하게 말한다면 무의미한 개인의 평범한 일생도 소중한 개인의 역사지만, 인류는 고비마다 의미 있는 역사의 사건을 통해 성장했다. 이렇게 말하면 사회진화론 신봉자처럼 여겨지지만 역사는 변증법의 법칙을 따라 나아가진 않는다. 이십 세기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이미 증명한 바다.
바빠서 먹고살기 고단해서 다른 일을 해야 해서 펴면 졸음이 쏟아져 책을 읽기 어렵다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목숨 걸고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숨을 걸만한 일과 독서를 병치하면 될 일이다. 파고 파도 튀어나오는 성찰의 샘을 에둘러 피해 가고 싶다면 말릴 주제도 아니려니와 내게 남은 시간도 노루꼬리만 하다. 밥벌이를 위해 시간을 쪼개는 형편에 누가 누구에게 이래라저래라 꼰댓발을 세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