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풍경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스쳐가는 나무, 벼 밑동만 남은 빈 논, 겨울바람에 찢어진 비닐이 펄럭이는 밭, 마스크를 쓴 채 검은 옷을 입고 유령처럼 걷는 산책인... 멀리 산자락의 아파트는 저녁 햇살에 환하게 젖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아파트의 이맛 빼기엔 물탱크가 점령군처럼 띄엄띄엄 옥상을 차지했다. 일 나간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는 시간이다.
나뭇가지를 물어뜯고 포실포실한 논두렁 흙을 파서 코를 들이밀고 냄새 맡거나 푸드덕 가시나무 덤불을 뛰어 날아가는 새떼를 눈으로 좇던 개는 지금 진지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창 밖의 풍경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공중부양하며 몸을 턴 갈대숲의 물가를 늑대처럼 질주하던 좀 전의 개는 근엄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본다. 늘 개를 옆에 두면서 행동을 관찰하지만 궁금하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 그의 상념을 지탱하는 생각은 무엇일까. 단순히 모르는 세상의 모습에 대한 깊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인간이 모르는 인식 체계의 안테나를 고요히 휘저으며 자신의 세계에 묻히는 중인가. 선사(禪師)는 구무 불성(狗無佛性)이라 했다. 일체의 업장이 소멸된 존재인 짐승은 불성이 없다고 말했다. 기쁨과 고통을 느끼지만 제한된 사유는 과거와 현재만 기억할 뿐 미래를 가늠하지 못하는 걸까.
인간이라고 똑별나게 영특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예측한 미래는 곧잘 틀렸고 절망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존재 가치의 무게를 비교 결정하는 게 곧 존재의 우열은 아니다. 생명 또한 그러하다. 증오한 자의 죽음이라도 떠오르는 감정은 슬픔이다. 그래서 억지로 치유를 가장하기보다 슬픔을 슬픔으로 어루만지는 게 진정한 치유일지 모른다. 고통은 아무리 오래된 고통이라도 현재적이며 개별적이다. 시인 김수영이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라고 한 건 주체적 자각의 존재를 강조한 거였다. 소수자, 장애인, 이방인 심지어 짐승도 함께 사는 세상이다. 다르고 못났어도 덜고 채워주며 살아가는 게 원시 공동체의 이상이었다. 역사의 진보라고 말할 때 '진보'는 언제나 좋은 건 아니었다. 간단한 예로 산업혁명의 눈부신 성장 이후 두 번의 전쟁으로 인류는 엄청난 비극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성장 또한 마찬가지다. '나아간다'는 표현 대신 '살아간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곰곰 되새긴다.
강아지로 입양되었다가 슬슬 청소년 티가 나는 개는 여전히 풍경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의 표정을 엿살피다 어쩐지 나도 개를 닮아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