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82)

好的故事

햇볕이 마당 구석구석을 들쑤신다.
잘게 부서진 봄볕의 기운은 구석진 곳을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봄을 품은 공기는 눅진하고 파삭해서 물기와 건조함을 포함한다. 한여름 습기라곤 없이 내리 쏟는 태양의 그것과는 다른 질감이다. 육십 도에 육박하는 에티오피아의 다나킬 평원에서 소금을 캐는 사람들은 매일 지옥을 경험한다. 땅거죽을 갈라버리고 땅 위의 산 것이라곤 모두 태워버릴 듯한 불더위는 정신마저 앗아간다. 봄의 광선은 씨앗을 적당히 데워 튀어나오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상황을 유도한다. 지구에 생명체의 기운이 퍼질 무렵부터 태양은 식물을 부추겨 초록의 춤바람을 충동질했다.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는 멸절을 반복하면서 시공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숲이 생기고 다시 사막이 생기고 다시 숲이 되었다가 솟아난 대륙은 산맥과 바다를 만들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봄에 굴복하고 만다. 계절의 기운에 무릎을 꿇는다는 건 절기의 순환을 몸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몸을 통해 계절의 공기를 마시고 볕을 쬔다. 구진한 겨울 양식이었던 김치에 물린 입맛을 새뜻한 봄나물로 헹궈내면 몸의 기운 밑바닥에서부터 풀 싹 돋아나듯 새로운 기운이 스멀스멀 솟아난다. 그건 정신으로의 상승과 분화를 기함이다. 추위가 되풀이되었던 지난겨울 뚝 떨어진 기온에서 몸은 움츠러들고 껴입은 입성 탓에 움직임이 둔하다. 몸의 굼뜸은 자연히 생각의 굼뜸으로 이어져 고인 웅덩이를 파들어가듯 한 가지 사유에 매몰되는 느낌이다. 사유의 질감은 자릿내처럼 쉰내가 난다. 겨울 볕이라도 환한 날 양지쪽에 앉아 내복을 훌훌 털어 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다. 물론 변화하는 것들은 쉬임 없이 질펀한 소문을 풍기며 썩어 들어간다. 일테면 바이러스의 집요한 전파와 더불어 정치권의 토악질 나는 풍문 말이다. 저런 것들은 어쩌자고 반문명의 작태를 저리도 멈출 줄 모르고 질러대는 것인지. 욕을 욕으로 덮고 똥을 똥으로 무지르는 저지레는 달아나는 사람에게 패악스런 똥물을 튀긴다. 우예든동 계절의 시작인 봄의 도래는 아침이고 청춘이고 새로운 시작이다. 봄의 단꿈에 겨울의 삭풍이 여전히 도사리더라도 봄은 더럽게도 봄이고 만다. 그러나 모든 봄은 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후로도 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피스트적인 생각이라면 시간의 흐름이나 날아 가는 화살도 멈춘 상태다. 봄은 오래전부터 직전에서 멈춘 상태인지 모른다.

내가 쓰려는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꽃길을 걸어가 봄나물을 뜯었던 영희와 철수는 결혼해서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다 죽었습니다가 아니라 눈물이 마르도록 절망적인 서사 말이다. 우물의 바닥까지 내려가 박박 긁어낸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파내려가 지구 반대편을 뚫고 나온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거다. 손톱이 닳아 빠지고 눈은 퇴화되어 감각만 남은 손으로 거머쥔 생의 비의 하나로 존재의 문을 여는 이야기 말이다. 문밖이 낭떠러지라도. 사실 나의 목소리로 내 얘기를 쓴다는 건 손이 오글거린다. 내가 살아온 길은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이지 못했고 더구나 세상의 저울로도 성공적인 삶은 못된다. 오만과 독선으로 꽉 찬 시선은 감동은커녕 욕먹기 십상이다. 교훈과 감동은 내 마음의 모양이 아니다. 쓰는 건 실패나 성공 여부를 떠나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기록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유효기간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다. 스스로 자위하고 치유하는 감정은 내가 느끼는 소중한 것이라 그렇다. 삶은 비뚤어져도 내가 주인이어야 할 터다.

이틀 휴무일 중 첫날.
아내는 간밤에 쑥과 불린 쌀을 방앗간에 맡겼다가 찾아오라고 했다. 짜증이 났다. 쉬는 날 떡을 맡기고 찾아오라니. 이틀을 떡에 매달려 나의 일정에 균열을 내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하지만 딱히 할 일도 가야 할 곳은 없었다. 삼월 들어 여행은 시들해졌고 그저 책 읽으며 빈둥거릴 작정밖엔 없었다. 다만 오롯이 나의 휴식을 누군가 금을 낸 것 같이 간섭하거나 참견하는 건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행위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그건 종일 길을 감시하는 업무 특성이 아니라 주 오일 근무에 갇힌 처지를 달가워하지 않는 심리가 근인(近因)이고 일을 하지 않으면 가늘게 먹어야 하는 입장이 원인(遠因)이다. 태어나 죽기까지 자본에 휘둘리는 인간의 조건인데, 난 노동에서 자유로운 넉넉한 입장이 아니다. 오랜만에 친구가 술 마시자고 했으면 두 팔 흔들며 나갔을지 모른다. 아침에 집을 나서 시내의 방앗간을 찾아갔다.

한 번 가본 곳인데 기억나지 않아 네비를 켜고 갔다. 새벽에 개와 산책할 때 소읍을 내려다보니 미세먼지가 심했다. 날이 밝아 슬슬 대기가 더워질 무렵에도 부연 미세먼지는 온통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지구인들의 폐가 망가져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면서 창문을 열고 담배연기를 풀풀 날렸다. 먼지 먹은 전용도로를 차들이 씽씽 달려 나갔다. 몽골의 사막을 달리는 야생 당나귀 떼 같다. 나는 지금 떡을 맡기러 간다.

실력을 인정한다는 건지 정이 많다는 건지 방앗간의 이름은 인정 방앗간이었는데 주택가 골목에 있었다. 굳이 소읍의 방앗간을 지나쳐 먼 데를 찾는 건 떡 만드는 솜씨가 근동에 소문났기 때문이다. 소읍은 여러모로 고집스럽고 구태적이다. 낡은 문을 열자 좁은 가게 안에 막 포장된 떡 상자가 바닥에 깔렸고 내외가 수증기에 묻혀 바쁘게 움직였다. 남자가 쳐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 앞에 쑥과 쌀을 내려놓으며 내일 찾을 시간을 물었다. 쑥은 아내가 작년 단오 전에 뜯어 삶아서 냉동해놓은 거였다. 냉장고 정리하다 쑥떡을 생각한 거였다. 쑥을 캐다 된장국을 끓이면서 쑥떡을 떠올리거나 쑥버무리에 봄날 입맛을 다신다. 보고 떠올리는 것과 보지 않아도 늘 가슴에 새긴다는 건 사무침의 차이일 거다. 사무친다는 건 마음 구석에 깊은 화인(火印)이 되어 무시로 고통을 되새기는 과거의 사건이다. 고통이 없다면 무시로 되새길 이유도 없다. 여자는 돌가루 봉지를 찢어 절편이라고 쓰고 전화번호를 적었다. 방앗간을 나와 폰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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