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83)

떡을 찾았다.
집에 돌아오니 떡은 두 뭉터기씩 나눠져 뿔뿔이 흩어지고 상자 바닥에 조금 남았다. 쑥의 향기와 버무려진 쫀득한 절편은 사람들의 입속에서 봄날의 햇살처럼 퍼질까. 인생은 무언가 저지르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고 겪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저지르는 무엇이 생산적인 거나 효율적인 거 냐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에게 유익한 행위나 산물 어느 것도 고정 불변하지 않고 심지어 그것의 가치 목록도 시간이 지나면 뒤죽박죽이 되고 사라질 테니 말이다. 무의미에 가치를 얹어 산다면 인생은 심심해서 미칠 것이다. 더러운 인생도 겪은 사람에게는 충분한 경험으로 남는다.

인간은 일반화와 보편화의 개념이 없다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거다. 개성을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은 친구가 떠날지 모르지만, 양념처럼 적당히 꺼내 쓰는 사람은 때로 주목받기도 한다. 삶은 개성을 드러내는 여행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진부하고 뻔해서 결말이 그저 그런 여행은 지리멸렬이다. 앎에도 온도차가 있듯이 여행도 삶도 각기 온도차가 있고 깊이와 넓이와 고저장단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신앙이고 목표고 동력의 중심이다. 자본의 순환하는 생명력의 동인도 자본의 극대화다. 자본이 더 이상 자생력을 잃으면 흐름이 멈춘다. 그러나 자본은 자면서도 몸뚱이를 불린다. 무의식이 된 욕망 구조는 꿈속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행위는 소비를 줄이고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거다. 자본이 확장성을 빼앗기면 스스로를 먹이로 삼아 자멸에 이른다. 그러나 자본에게 유리한 건 현대인이 자신의 존재를 소비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믿고 따르는 데 있다. 소비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명제는 사유를 뛰어넘었다. 자본은 신적인 존재로까지 격상되었다.

나는 머물 곳을 찾고 있다.
집을 떠나 정확히는 가족을 떠나 낯선 곳에서의 독거를 구상 중이다. 바다가 멀지 않은 숲이면 좋겠는데 그런 이상적인 장소에 나를 위한 빈집이 '어서옵쇼' 하고 기다릴 리는 만무하다. 일 년 치 세를 주고 머무르며 근동의 적당한 곳을 알아보는 것도 방법이나 시간은 예전처럼 단계별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맥박이 멈추면 언제라도 인생의 기차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누구라도 죽음을 준비하고 역에서 내리기 위해 선반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잊은 물건이 없나 앉은자리를 살피는 여유는 없을 거다. 우연히 기차에 오른 것처럼 달려가다 내리게 되는 것뿐이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남겼는가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작별 인사 없이 낯선 역에 내려야 한다. 그게 삶의 끝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는 건 각자의 몫이다. 인생 이모작이니 새로운 삶을 설계한다는 등의 얘기는 진부하고 흔해빠진 상투어라 반복하기 싫다. 내가 현재 만나는 사람과 읽고 있는 책, 그리고 사고의 중심을 이루는 게 지금까지 살아온 나인데 다시 살아본다고? 차라리 새로 태어나는 게 낫다.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변화는 두렵거나 모든 걸 버리는 행위기 때문이다.

휴무 이틀이 정오를 넘었다.
오전엔 빨래 널고 개와 산책하고 떡을 맡기고 찾느라 다 보냈다. 오후엔 책을 편 채 졸았다. 좁은 마당에 눈부신 봄볕이 대책 없이 쏟아진다. 개는 산책의 포만감을 즐기며 그늘에 널브러졌다. 작년 가을 집수리하고 남은 모래를 덮은 잔디밭에는 까끌한 잔디 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약하게 전정한 체리나무는 많은 꽃망울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재작년 말뚝처럼 잘라놓아 마누라 잔소리를 겪느라 혼났는데 올봄엔 꽃 치레 좀 듣게 생겼다. 마당 구석에는 이미 자리 잡은 잡초가 점령군처럼 슬슬 초록 포화를 쏘아댄다. 바이러스는 비대면 사회로 전환하며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유럽과 미국의 의료체계는 사정없이 무너진 데 비하면 동양권은 선방하는 중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외치며 삶의 양식이 변해야 한다고 힘준다. 코로나가 빨리 끝나 일상의 복원을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코로나가 숙진다고 해도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전보다 그악한 삶의 행태가 되풀이될 것 같다. 불확실한 생태의 공포를 겪은 사람들은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자본과 쾌락의 탐닉을 제대로 즐길 참이기 때문이다. 만족을 모르는 쾌락은 더 높은 자극을 원한다. 에리히 프롬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물리적 시스템의 변환과 함께 정신의 계몽을 전제로 한다. 어려운 명제다. 이미 깊은 병으로 전염된 지구의 공기를 어떤 방법으로 휘저어 새로 갈아 넣을 건가. 현자는 곳곳에 나타나 인류 마지막의 복음을 전하지만 실천은 멀다. 조롱과 비아냥을 밥먹 듯하며 살아내기엔 그들의 현실은 복되고 고통스럽다.

부모와 자식을 죽이고 자동차에 개를 매달고 끌거나 아파트 베란다에서 고양이를 던지는 행위를 보면 인간의 그악함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아연해진다. 정치는 뻔뻔함을 넘어 토 나오는 걸 참아야 뉴스를 볼 정도가 되었다.

아모르파티(Amor fati)는 자신의 운명을 즐기라는 뜻이지만 현실 순응의 의미는 아니다. 운명의 거부에 가깝다. 영원 회귀하는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라는 전언이다. 그렇다면 공연한 희망을 지껄이거나 무한 긍정을 지껄이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무장해야 나의 삶을 전개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주체적으로 경험하고 행동하는 개인들이다. 가족주의와 종교, 국가주의의 개념에 함몰된 의식으로 불행한 삶을 산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사상의 도그마는 유통기한이 정해진 식품과 같다.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자명한 이치는 말하기는 쉬워도 쉽게 실천하지 못한다. 자살의 원인이 우울증이니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 우울증을 낳게 한 근인과 원인을 외면하고 약물치료를 권장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자본으로 해 뜨고 지는 시스템으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그렇다고 나만 잘살면 된다고 담을 쌓는 건 위험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변한다.
생명도 유한하다. 변하지 않는 화석 같은 마음으로는 성장과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 고정불변의 진리는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모습만 조금 닮았을 뿐, 달라졌다.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낀다면 죽어 있는 상태다. 삶은 목적 없이 변화를 향해 달리다 끝난다. 그럼에도 인간다운 삶의 양식을 위해 무수한 고통이 벌어지고 억울한 죽음이 쌓여갔다. 입때껏 생각하고 살아온 상태가 이 정도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김없이 돋아나는 풀 싹을 보며 봄을 느끼지만 진정한 봄은 여적지 멀다. 우리는 어느 길로 갈 것인가(我们走那条路).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잡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