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살 적에 알게 된 분이 있다. 올해 아흔일곱 살 되었는데 할머니와는 십오 년 넘게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냈다. 얼마 전 오랜만에 강릉 나들이할 때 만나 뵈었는데 할머니 방에는 내가 선물로 드린 그림 「대화」가 여적지 걸려 있었다. 겨울밤 할머니 문살에 환하게 비친 풍경을 그린 거였다. 내가 드린 시집은 손님이 드나드는 서슬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밭에서 기른 달래, 머위서껀 봄나물을 시내 난전에서 팔지 못해 답답하다고 하셨다.
이웃하고 살 때 할머니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는데 대부분 내가 태어나기 전의 과거였다. 오대산 자락의 골짜기에 살았던 할머니는 산 너머 마을로 시집가고 아이들 자라면서 바닷가 마을로 내려왔다. 장성한 아들들은 대처에 살면서 홀로 사는 어머니를 잘 모신다. 할머니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처음 남편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지게꾼으로 징발되어 타의로 월북했고, 두 번째 남편은 월남한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우리말의 시대 맥락을 읽었고 역사의 귀퉁이에서 휩쓸려가는 민중의 덧없는 슬픔도 느꼈다. 전쟁 통에 눈치 살피며 고사리 꺾으러 올라간 산에는 죽어 자빠진 인민군의 주검이 널브러져 혼비백산 달아난 적도 있다고 했다. 요즘은 쓰지 않는 송장 썩은 물이란 뜻의 추깃물도 할머니의 말속에는 어제처럼 스며 있었다.
할머니는 학교 문 앞에도 간 적이 없지만 한글과 한문을 잘 읽고 썼다. 궁금해 물으니 여자애라 서당에 안 보내서 사내아이들의 글 외는 소리를 들으며 깨쳤다고 했다. 학동들이 쓰다 버린 종이를 주워 한문을 익혔는데 한 번은 습자할 종이가 없어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서낭당 당목에 두른 새끼줄에서 종이를 빼다 글자를 썼다고 해서 놀라기도 했다. 으스스한 밤에 어린 여자애가 서낭당에 가다니 나로선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산골 마을에서 바닷가로 내려와 할머니는 시골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며 농사를 지었다. 두 번째 서방은 북쪽을 그리워하며 놀고먹었다. 자식을 키우고 가르치는 일은 순전히 할머니 몫이었다. 공부에 목말랐던 할머니의 바람대로 자식들은 바르게 자랐다. 할머니의 흠이라면 경우가 너무 밝아 탈이라는 거다. 남에겐 너그러워도 자식들은 지금도 엄하게 대한다. 내 손으로 밥 끓일 때까지는 아들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신다.
블랙커피 좋아하는 내 입맛을 기억하시고 끓여주는 커피를 맛나게 마시고 일어서는데 할머니가 따라나선다. 창문을 내리라고 우기시더니 그예 꼬깃한 오만 원 한 장을 여비 하라며 쥐어준다. 오만 원을 만들려고 지팡이 짚으며 시내 나가 오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바라봤을까. 돌아오는 내내 할머니의 인정에 감사했다. 아래 글은 할머니의 구술을 받아 쓴 졸시 「육이오 담화」다.
육이오 담화(談話)
어마이 난리 끝나면 좋은 세상 반드시 올 겁니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라요... 부연동(釜淵洞) 골짜기 밀려들어온 인민군 코밑 거뭇한 솜털 자욱 선명한데 제 키만 한 총대 끌고 먼산 바라보다 고향 생각에 눈시울 적신다
원산 푸른 바다 고향인 서방도 떠나고 내 나이 팔십에 지나온 길 돌아보면 엊그제 같은데 올해도 감또개 뚝뚝 떨어지는 육이오 무렵 지난 시절 또렷이 떠올라 오늘 비름나물 풋고추 한 광주리 이고 지고 시장거리 난전에 푼돈 사러가는 고단한 말년이어도 죽어 자빠지면 살아 뒤끓는 구더기만도 못한 것 아니야
아직도 눈에 선해 그때 그 어린 인민군 지금쯤 고향땅에서 부모 모시고 잘 살고 있을 거야 내 살아생전 지나친 듯 한 번이라도 만나면 그때 가마소[釜淵洞] 맑은 샘물 푸지게 길어다가 막힌 가슴 뼛속까지 후련하게 씻어내도록 마시게 해 줄 거야 암만, 그렇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