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by 소인




사방 캄캄한 동굴이다.
딸네 집 안방에 침대 들이고 누웠다. 새로 세 시나 되었을까. 사락사락 양철지붕 위에 싸락눈처럼 내리던 빗소리 그친 지 오래인데 통 시간 잴 수 없다. 하긴 매일 똑같은 하루인데 시간 따져 뭐하겠나. 지겨운 잠 실컷 자고도 또 온다. 깨고 잠드는 게 일이지만 눈 떠도 일어나기 싫다. 무력감은 오랜 동무다. 살아온 기억 어제 같이 생생하다가도 가물해진다. 꿈인가 생신가 뭘 본 것 같기도 한데 코앞은 막막한 어둠이다.

눈을 감으면 외려 희부연 물체가 움직이며 나타난다. 십 년 전 죽은 샘실 댁이 수건 쓰고 밭에 가는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죽은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창문을 들여다본 것도 같은데 여긴 딸네 집이다. 창문이라곤 콧구멍 만한 게 바로 옆집 마당이라 누가 다닐 길도 아니다. 아... 아들 집 거실에서 내다본 풍경이었다. 커다란 거실 베란다 창으로 단호박 밭과 논 펼쳐져 있는데 밭으로 일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모두 검은 옷과 회색 옷을 헐렁하게 걸친 차림이다. 어슴새벽에 일어나 사람들이 일하러 우르르 밭으로 가면서 날 기웃대며 들여다봤는데 도무지 꿈같았다. 사람들 등 뒤로 아슴프레 이내가 깔렸다. 하나같이 낯익은 얼굴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요 며칠 계속 보이는 게 이상했다. 말을 건네도 대답 없이 가만히 보다 밭께로 스르르 멀어졌다. 나중에 며느리한테 말했더니 단호박 밭은 불더위에 한 번 수확하고 내버려 둬 호박 줄기만 말라비틀어져 아무도 일하러 오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진찰받아야겠다고 구시렁거렸다. 꿈인가. 꿈과 환시를 보았단 말인가. 맞아. 며칠 뒤 의사에게 갔다. 젊은 의사에게 본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말했다. 보태지 않고 낱낱이 얘기할수록 의사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웃음이 얼비쳤는데 묵묵히 듣고 묻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계절과 오늘이 며칠이냐고 묻고 약을 지어줬는데 난 평소에도 버릇처럼 음력을 센다. 약 먹고부터는 사람들이 뜸하게 찾아오다 아예 걸음을 끊었다. 내가 본 것은 틀림없는 골골이 삼포가 널따란 샘실, 웃말 사람들이었다. 날 새면 거실에 불 켜지고 소란스러워지고 밥 먹으라고 깨우겠지. 밥도 싫다. 움직이지 않으니 밥이 먹히나. 부른 배는 쉬 꺼지지 않는다. 딸 눈치 봐서 국 말아 몇 숟갈 떠야겠다. 사철 지나는 게 하나도 신기하지 않다. 꽃 피고 떨어져도 즐겁지 않고 슬프지 않다. 아이들 집 사고 살림 뻔드르해져도 궁금한 거 하나 없고 재미나지 않은지 오래다. 공연히 가슴만 벌렁대는 게 이리 생각해도 걱정 저리 굴러도 걱정 자식들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쓰는 걱정 하짓날 감자 캐듯 줄줄이 달려온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죽는 게 무섭다. 이승에 미련이라곤 털끝 만치도 없는데 왜 이리 죽음이 두려울까. 모르겠다. 먼저 간 남편은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이다. 허우대 멀쩡해 그간 딴살림 났을지 모른다.

아침 먹고 딸은 일하러 갔다. 딸은 일하고 김 서방은 논다. 밉지 않다. 노염도 없다. 밉지 않은 건 아닌데 미워할 수 없다. 딸이 강릉 살 적에도 사위는 놀았다. 집이 일터라고 했다. 김 서방은 집에서 노는 것도 일하는 거라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딸이 일하러 간 뒤 엎드려 책 보는 사위 뒤통수에 대고 지껄였다. 그걸 백날 보믄 떡이 생기나 돈이 나오나. 그 후로 김 서방은 입도 떼지 않았다. 답답해서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매형 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 김 서방 입이 열린 건 그 후로도 한참 뒤였다. 김 서방은 이사 와서도 논다. 산불감시원 끝나고 여기저기 일자리 구하다 포기했다. 팔다리 아프다며 툭하면 앓는 소리 해댄다. 김 서방은 틈만 나면 말을 건다. 어떤 날은 가물가물한 주민번호를 종이에 커다랗게 써서 외우기도 했다. 자기가 날 쓴 글이라며 읽어주기도 했다. 기억나면서도 가물했지만 억지로 웃어주었다. 내가 환갑 때 일이란다. 추석 때 무렵이다.

명절도 술 바람에
파장 난 사위 놈
아침 양치질
왝왝거리면서도
해장국 하난 술술
잘 넘겨
빠알간 오늘까정
쉬어도 되련만
식전 전화 한 통에
머루 따러간단다
밥숟갈 허둥지둥
맘이 더 급해
수건 질끈 동여매고
일 나가는
우리 장모
질러가는 논길 따라
가을 풀 춤추고

그때는 청춘이었다. 눈감았다 뜨니 팔십 년 세월이 금방이다. 나도 이제 늙었다. 몸도 마음도 급한 내리막이다. 엄살이 자꾸 는다. 딸이 내 숟가락에 반찬 얹어준다. 오래전 딸아이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던 열무김치를 오늘 엄마 숟가락 위에 올려준다고 김 서방이 말한다. 소리 나서 내다보니 김 서방이 시래기 삶는다. 엊저녁에 꽃 농사하는 막내딸이 가져다준 거다. 오전 내내 삶고 불려 껍질 벗기는 걸 옆에서 봤다. 난 다리가 아파 주저앉지 못해 사탕 하나 까주고 도로 들어와 누웠다. 물기 꼭꼭 짜더니 도마에 썰어 봉지마다 담는다. 저런 건 잘하면서 돈벌인 잼병이다. 어떨 땐 부러 안 버는 거 같다. 사위는 백년손님도 되고 개자식도 된다더니 딱 맞다. 화나지 않는다. 화가 다 무슨 소용이랴. 나도 이제 아들만 찾지 않는다. 전에는 딸네 집에 갔다가 발길 끊었는데 아무래도 아들만 못해서가 아니라 갑자기 죽어도 아들 곁이 맘 편하기 때문이었다. 아들네 살면서도 가끔 요양병원에 보내니 차라리 딸 아들 구별 말고 아무 데라도 자식들 곁이면 상관없이 되었다. 하나뿐인 며느리가 무슨 죄인가 싶기도 하다. 그제 사달이 났다.

헛것이 보인 뒤로 전국이 팔팔 끓던 불더위 동안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집에 온 지 하루 지나 아들 며느리 없는 동안 둘째가 찾아왔다. 텃밭에서 고구마 줄기 따던 딸이 집에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어스름 저녁에 아들 내외가 찾아왔다.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구마 줄기 껍질 벗기던 김 서방 '노심초사'라고 짧게 뱉었다. 들어오던 며느리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그게 무슨 말이냐고 김 서방에게 소리쳤다. 억울한 표정이었다. 내가 딸 사위에게 며느리 욕한 것도 아닌데 난감했다. 어디서 큰소리냐고 김 서방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건 아니지 않으냐고 아들이 말했다. 김 서방은 집에서 아들은 밖에서 마신 술로 불콰했다. 딸이 아들 내외더러 집으로 가라고 떠밀었다. 다음날 딸이 침대를 안방으로 옮기고 김 서방은 작은방으로 밀려났다. 오후에 김 서방과 청량산으로 바람 쐬러 간 동안 아들이 짐을 날라놓았다. 짐이라야 한 달치 약과 옷이 든 박스 달랑 두 개. 아니 나까지 세 개다. 꽃 농사하는 막내딸이 시래기랑 하얀 꽃 핀 부추, 단호박과 요즘 딴다는 글라디올로스 한 무더기 안고 나타난 건 그날 저녁 어스름이었다.

짐②
아침 공기가 뚜렷하게 달라졌다.
차를 몰아 시내 쪽으로 달렸다. 시내를 통과해 남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탈 생각이다. 서둘러 볼일을 마치면 점심때 지나 돌아올 수 있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네비 아가씨의 건조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벌써 세 번째다. 대만의 어학원에 취직한 딸의 서류를 준비한지는. 관광비자는 삼 개월이지만 취업비자는 일 년이다. 취업하고 서류를 갖춰 대만 교육부에 내면 공작증(工作证)을 내준다. 그러면 일 년 이내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아르바이트했을 땐 삼 개월마다 한국에 나왔다. 대만사범대 랭귀지에 다닐 땐 유학비자로 기간이 길었지만 오래 있으려면 취업이 필요하다. 한데 일차, 이차로 서류를 내도 공작증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꾸 다른 서류를 원했다. 그때마다 아내가 읍내 컴퓨터 가게에서 서류를 뽑고 난 우체국에서 항공택배로 서류를 부쳤다. 집의 인쇄기는 잉크가 모자라 흐릿해서 건당 천 원을 주고 가게를 이용했다. 딸의 지인은 사 개월이 넘어서야 공작증이 나왔다며 대만 사람들의 느려 터진 일처리를 욕했다. 이번엔 얼마나 걸릴까. 만일을 대비해 필요하지 않은 서류까지 한 보따리 싸 보내면 어떤 핑계에도 대처할까. 마지막엔 한국의 사 년제 대학을 증명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딸아인 볼멘소리로 알렸다. 대체 국가 간에 정규 대학의 졸업증명과 성적확인서를 믿지 못한다면 무엇하자는 건가. 대만도 한국처럼 청년실업과 고물가로 몸살 한다더니 외국인의 취업 자체를 막아보자는 심산인가. 자꾸 의심이 갔다.

전용도로를 막힘 없이 달려 시내가 가까워오자 길이 슬슬 막힌다. 원당로에 접어드니 아예 이차선은 주차장이다. 아, 오늘이 장날인 게 생각났다. 달리 우회할 도로도 없어 내처 지나기로 느긋하게 마음먹고 왼팔을 창에 기댔다. 아침 일찍 채소를 싣고 나온 트럭들이 이 차로에서 짐을 부리는 중이다. 신호등이 없는 철길 건널목 교차로에 오자 차들이 엉켜 서로 밀고 야단이다. 철길에 걸친 차도 보였다. 저러다 기차가 오면 어떡하지. 간수가 미리 차를 세우겠지만 간수가 없는 건널목이라면 대형사고가 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데서 큰 사고가 일어났단 얘긴 여태 들어보지 못했다. 쓸데없는 상상이다. 주춤주춤 차 앞머리 들이밀고 교차로를 통과했다. 길 한쪽엔 차일이 펴지고 물건을 늘어놓은 장꾼들이 손님을 불러 세웠다. 왼편 비탈길을 넘어온 아침햇살이 사람들 머리에 환하게 내려앉았다. 자동차와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가 마치 진흙 먼지 자욱한 마다가스카르나 인도의 장터를 연상케 했다. 먼길을 걸어 가축을 몰고 온 사람, 광주리에 열대 과일을 이고 새벽길을 열고 온 아낙들, 짐승과 사람이 엉킨 오래된 장터가 떠올랐다. 커다란 눈망울을 데룩거리며 처음 본 낯선 풍경에 몸을 떠는 물소의 표정, 어미와 떨어지는 새끼 염소의 애타는 울음과 끈질긴 흥정, 머리 뒤로 바오밥나무에 걸린 붉은 태양...... 그러나 여기는 한국의 작은 지방도시다. 그것도 나날이 쇠잔해지는 풍경의 오일장이다.

장모는 내가 올 때까지 동굴 같은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을 거다. 식사 때마다 부르면 표정 없이 나와 아기 주먹만큼의 밥덩이를 물에 말거나 국에 말아 후루룩 마시고는 빈 그릇을 개수대에 넣고 들어가 눕는다. 아내가 잔소리하면 마지못해 마당을 두어 바퀴 돌다 들어와 다시 침대에 모로 눕는다. 텔레비전을 켜놔도 흥미가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즐기는 연속극의 시간대를 아침저녁으로 꿰며 텔레비전 앞에 앉았는데 요즘엔 그마저도 취미가 없다. 꽃이 핀다고 즐거울 게 없고 맛난 음식을 먹는다고 기꺼운 마음이 없으니 얼굴의 근육은 주름과 함께 점점 굳어졌다.
사 년 전까지 장모는 혼자 살았다.
읍에서 삼십 분 떨어진 시골집은 내가 결혼 전 인사하러 간 집이고 장인이 돌아가신 동네다. 서울 놈이 처음 찾아가서 마당에 쌓인 장작을 패느라 한나절이 걸렸다. 시작은 몇 짐이나 패 놓을까 했다가 내친김에 잘 보인다는 게 도끼질하다 보니 장작이 산더미로 쌓였고 양손바닥엔 물집이 잡혔다. 그때 장인이 좀 웃은 것 같았다. 해마다 여름휴가 때 아이들과 내려와서 경운기도 몰고 다니고 근처 웅덩이에서 붕어를 낚았다. 장인 장모는 나를 생판 서울내기인 줄 알고 있었지만 이미 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었다. 추석 때는 서울 본가에서 아침 먹자마자 막히는 길을 뚫고 죽령고개를 허위허위 넘어와 처가에 도착했다. 여문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논에서 메뚜기를 잡아다 볶고 불콰하게 단풍 물든 감나무 아래 마당에서 숯불에 지글지글 고기 구워 처남과 소주를 마셨다. 시골을 동경했던 내게 처가는 훌륭한 공간이었다. 처가 식구들 모두 선한 사람들이었다. 살다 보면 상처 없는 집안 어디 있겠는가. 우리 집안은 서로에게 맺힌 원한과 상처를 드러내고 고통을 키웠지만 처가 식구들은 깊은 내상에도 참고 견디는 성정을 타고난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눈물겹도록 좋았다.
장인은 어느 가을날 허망하게 죽었다.
여느 날처럼 일찍 아침을 먹고 밭에 나가려던 장인이 머리가 아프다고 좀 쉬다 나간다며 누웠다. 잠든 줄 알았던 장모는 두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던 장인을 깨웠는데 움직이지 않더란 거였다. 뇌출혈이었다. 아내와 함께 밤길을 달려 내려왔고 처남은 푸른 군복을 입고 달려와 울었다. 장인의 나이 환갑도 지나기 전이었다.

혼자 살던 장모는 명절에 내려와 올라갈 적마다 눈물을 찍었다. 그 사이 내가 시골로 내려와 주저앉고 처남은 군청에 다녔는데 사 년 전부터 밤마다 귀신이 나타난 거였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장모의 꿈에 나타나 집에서 살지 말라며 험한 인상으로 쫓아내더라는 거였다. 그때부터 장모는 처남집에서 며느리와 살게 되었다. 근동에서 꽃 농사하는 처제네와 경기도에서 슈퍼 하는 처형, 그리고 아내 삼녀 일남이다. 막내 처남이 있었는데 근위축병을 앓다 스무 살 무렵 요양원에서 죽었다. 집에 있을 땐 휴가 때 차에 태워 놀러 가기도 했던 막내였다. 유해를 산에 뿌린 장모는 한동안 알루미늄 캔을 모으기도 했는데 그걸 시설에 보내면 장애인용 보조기를 만드는 데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막내 처남이 떠난 후 처가에서 막내 처남의 얘긴 다시 나오지 않았다. 가족의 아픔은 짙은 가을 안개처럼 가라앉았고 연초록 새살이 그 위에 조금씩 돋아났다.

시내를 가로질러 통과하는데 시간은 생각보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고속도로 IC 쪽으로 가다 보니 길은 어느새 작년에 다니던 베어링 공장이었다. 정확히 백일 동안 공장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줄줄 새던 지붕을 새로 올렸다. 팔팔 끓던 초복에 들어가 시월 말에 나왔으니 두 계절을 겪은 셈이다. 오며 가며 인사했던 외국인 노동자들, 함께 쓰레기 밥 먹던 동료들 잘 있을까. 지금쯤 아침 먹고 각자의 구역에서 쓰레기 치우고 공장 바닥을 청소차로 밀 시간이었다.

삼십 년 지나 들어간 공장은 예전과는 딴판이었다. 시설의 규모와 매끈한 외관이 아니라 자본 운영의 방식이었다. 슈퍼바이저로 불리는 실질적 오너는 판만 벌이고 지배권을 행사하고 각 부문의 공정을 소사장들이 꾸려나간다. 광산의 나눠먹기식 덕대와 비슷한 구조다. 광업권을 가진 사장이 여럿의 하청을 거느리고 수익을 배분하고 관리 감독한다. 3%의 지분을 가진 자가 그룹의 회장 행세를 하는 경우와 얼추 맞다. 생산량 감소와 손실의 부분은 소사장과 하청에서 부담하니 지배권을 쥔 오너는 그것에서 자유롭다. 수익이 내리막이고 효용가치가 없을 땐 하룻만에 사업장을 폐쇄하고 외국에 공장을 세울 수도 있다.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노사분규가 일어날 여지도 원천 차단한 구조다. 그러면서도 하청업체의 사장과 노동자는 관리부만 있는 오너의 지배하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다. 이교대로 돌아가는 기계에 매달리다 퇴근하는 젊은 노동자의 얼굴은 언제나 하얀 국화처럼 핼쑥한 낯빛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을 체육대회에 나타난 지역 국회의원은 공장 근로자의 체력 향상을 위해 자전거로 출퇴근할 수 있도록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겠다고 침을 튀겼다. 일 초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 푹 늘어져 자고 싶은 게 노동자의 심정인데 한가한 소리나 해대니 여기저기서 쌍욕이 터져 나왔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성큼 다가온 가을 냄새가 풍긴다.
전방에 졸음쉼터가 있습니다.
네비 아가씨의 안내를 귓등으로 들으며 페달에 힘을 주었다

왈! 왈!
작은 몸통에서 울려 나오는 신경질적인 소리였다.
어딘가 이웃집의 개다.

어머니, 나비가 날아왔네요.
그래...

장모는 엉덩이를 플라스틱 의자에 빠질 듯이 아슬하게 걸치고 앉았다. 사위는 뒤란에서 캔음료 두 개를 가져와 옆에 앉는다. 장독대 옆의 기름한 화분에 심은 만수국 꽃 위에 얼룩 나비가 날아왔다. 이쁜 얼룩무늬다. 나비는 하늘하늘 공중을 내려와 꽃에 앉더니 날개를 포갠 채 주둥이를 내민다. 꿀을 빠는 것일까. 향기도 없는 꽃에 꿀이라도 든 걸까. 나비는 한참을 멈칫대며 꽃 속을 탐색하는 눈치다. 오후 들자 하늘은 잿빛으로 변했다. 몽글거리며 회색 구름이 몰려들어 마당이 어두 컴 할 정도였다. 점심을 안 먹겠다는 장모를 구슬려 마당에 나왔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 사위와 장모가 나란히 앉아 꽃에 날아온 나비를 바라본다. 지금 장모가 보고 있는 나비는 예전의 나비가 아니다.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처럼 끌탕하는 젊은 시절의 나비도 김흥국의 비틀대는 호랑나비도 아니다. 한때 김장밭에 몰려와 푸른 배추 잎사귀에 푸른 배추벌레를 까놓던 성가신 날벌레일 뿐이다. 이른 봄에 흰나비를 먼저 보면 운이 좋단 말도 처녀 적의 가슴 부푼 시절의 얘기다. 지금 김 서방이 가리키는 곳에 나타난 얼룩 나비는 공연히 시야를 어지럽게 거스르는 점점이 흔들리는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 저녁이면 일하러 나간 둘째가 돌아올 것이고 그때라야 종일 김 서방에게 좀 미안했던 심정이 가시며 딸의 동작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는 게 장모의 주된 일이다. 사위는 결단코 불편하다.

반면 아들은 딸보다 윗질이었고 딸은 안중에도 없던 존재였다. 가난한 살림에 딸들을 가르치는 건 애당초 언감한 형편이었다. 시골에서 중학을 마친 딸들은 각자 알아서 대처로 나가 스스로의 힘으로 벌어먹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짝도 알아서 만나고 시집갔다. 늦도록 많이 배운 건 둘째 딸인데 사는 건 제일 못하다. 아들은 집에서 보태 대학을 마쳤다. 남편 죽고 아들 곁에서 살 작정이었다. 그나마 정신이 온전했을 땐 둘째와 아들 집을 오가며 살았는데 몸과 정신이 기우듬해지면서 아들 집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번 며느리와 사위의 사달이 난 뒤론 둘째 네 서 살게 되었다. 딸 집에선 서서 밥 먹는다는 말도 이제 와선 희미해졌다. 당최 운동량이 없으니 소화는 물론이고 밥맛도 없다. 딸이 뭘 차려내도 입에 구쁘지 않다. 두어 술 뜨면 밥그릇이 비었다. 종일 누워 있으면 눈에서 진물이 나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분별이 없다. 전기세 겁나 낮에도 불을 끄고 있으니 캄캄한 동굴 같은 방에서 시간의 개념도 모호하기만 하다. 아무 생각이나 떠올랐다 사라졌다. 머릿속은 금방 헝클어졌다가도 자동 삭제 기능이 있는 것처럼 말끔하게 비워졌다. 사소한 일머리도 지워졌다. 시래기 볶음을 하려면 마늘을 넣어야 하는지 팬에 기름을 먼저 둘러야 하는지 아니, 시래기를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아니면 시래기를 왜 볶아야 하는지부터 도통 알 수 없었다. 점점 섭생의 의욕과 인과관계가 흩어지고 말았다. 빨리 죽어야 하는데 그래야 우물쭈물한 혼돈의 상태에서 맘 편히 벗어날 텐데 몸은 마음과 달리 아침에 밥 먹고 약을 먹고 나서 주머니 속에 저녁 약을 챙긴다.
사위와 딸은 이런 장모를 보고 장사꾼과 노처녀의 삼대 거짓말이라며 웃었다.

목요일에 요양병원에서 진단서 끊으려던 계획을 다음 주로 미루었다. 외래환자의 의사 면담은 매주 수요일에 있다는 간호사의 전언이었다. 진단서와 투약 기록, 입퇴원 증명서 등을 첨부해 읍사무소에 내면 국민연금공단에서 장애등급 심사를 해서 알려준단다. 등급이 나오면 낮시간에 노인복지원에 갈 생각이다. 겨울에 접어들어 사위마저 산불감시원 일을 나가면 장모 혼자 집에 있게 된다. 움직이다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손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등급판정 이후의 일이다.

고객님, EMS(EE350437463 KR)의 국제 항공운송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우체국(1588-1300)

두툼한 서류를 딸에게 부쳤다.
딸은 연신 고맙다는 이모티와 함께 나라의 안부를 물었다.
나라는 열여섯 살의 늙은 개다. 이 주 전부터 하혈을 하더니 식음을 끊고 축 늘어진 녀석을 병원에 데리고 갔다.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에 상자와 신문지를 깔고 안고 갔다. 생전 처음 동물병원에서 초음파와 혈액검사를 받았다. 깡마른 손목의 젊은 여의사는 자궁염과 패혈증 진행이 의심된다고 했다. 다행히 자궁 안에서 염증이 터지는 폐쇄형이 아닌 개방형이라 염증성 하혈은 나은 편이라고 하며 주사를 놓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맛있는 걸 먹이라고도 했는데 그 말은 이별이 가까웠단 말로 들렸다. 나라를 안고 돌아오는 길에는 속없는 달맞이꽃이 대낮에도 환하게 피어 있었다.

장인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아니 그건 사위의 시선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낀 장인의 모습이었고, 정작 본인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쌍하다는 것 말이다. 이승에 태어난 존재는 모두가 약하고 불쌍한 존재다. 우주에 목적이 없는 것처럼 사람의 태어남에도 당위의 목적이 없는 건 자명하다. 목적이란 태어나 자라면서 학습된 조건과 상황에서의 목적이지 본래부터 생래적으로 타고난 건 아니다. 보편적 인간의 존엄이란 말의 '보편'도 시대와 조건에 따라 정의를 달리한다. 장애와 비장애인으로 나누었을 때 장애인의 '장애'도 조건과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장애란 조건 하나로 일체화시킬 수 있는 개념의 규정은 진실이 아니다. 어떻게 외팔이와 시각장애인의 조건이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비장애인, 이전에 정상인으로 불렀던 비장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장인은 쓸쓸한 세상을 보기 좋게 비웃으며 보짱대로 살다 간 사람이었다.

장인은 드문 골격과 생김새를 가진 사내였다. 오죽하면 입관할 때 대형 관이 안 맞아 특별히 다시 주문할 정도였다.
장인의 가계는 어릴 적부터 시대의 비극을 몸소 체험해야 했다.
장인이 다섯 살 되던 해 그러니까 해방 이태 전 장인의 부친은 홋카이도오(北海道) 징용에 끌려갔다. 다시 러시아 땅 사할린으로 옮겨 거기서 생애를 마쳤다. 남편이 징용 간지 삼 년 만에 기다리던 모친은 홀연히 떠나 재가하고 어린 장인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찰칵 대문 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정확히는 대문 빗장의 걸쇠를 푸는 소리다. 둘째가 돌아왔다. 장모는 아까부터 침대에 누워 대문 쪽으로 귀를 한껏 열어두었다. 가끔 김 서방이 들여다보며 점심을 먹겠냐는 둥 마당에 나가 산책 좀 해야 소화가 되지 않느냐, 심심하지 않느냐는 둥 참견을 하지 않으면 일체의 잡음이 소거된 공간이다. 재작년에 둘째가 시골집을 사서 수리할 때만 해도 어찌 먹고살겠다고 친정 동네로 들어오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오늘처럼 밥만 축내는 어미가 딸과 사위와 밥상을 마주하니 서글픈 생각이 장마 통 물탕처럼 잠기는 꼴이다. 점심은 건너뛸 요량인데 매번 사위가 점심상을 차려 불러냈다.

엄마 나 왔어......

둘째는 마당에서 안에다 대고 말한 뒤 플라스틱 의자에 풀썩 앉았다.
일에 지친 모양이라고 장모는 생각했다. 문득 김 서방에게 미운 감정이 솟아난다. 막혔던 샘물이 터지듯 멀쩡한 사지 놀리지 않고 판판이 노는 사위에게 미운 화살 마구 쏘아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젠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둘째 네 서 얹혀살게 된 처지가 아닌가. 노여운 생각일랑 장롱 깊숙이 찔러두고 아무려나 데면데면하게 처신해야 하리라고 마음 고쳐 먹기로 한다.

스르르 허물에서 빠져나오는 밀뱀처럼 장모는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왔나?......

주방을 지나 마루로 내려서는데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없다. 발은 딛고 몸은 붕 뜬 기분이다. 물 위를 걸었다는 예수가 이랬을까. 휘청거리며 뒤로 몸이 기운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한 손으론 허공을 그러쥐었다. 손에 잡히는 건 오후의 투박한 침묵과 방금 전의 말소리뿐이었다. 둘째는 기척을 못 느꼈는지 등을 장모 쪽으로 향하고 조용히 눈을 들어 마당의 무너진 분꽃 더미를 바라본다. 지난 폭우 때 제 무게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진 것을 곧추세웠더니 이번엔 뒤로 발랑 넘어진 꼴이다. 볼품없었다. 한때는 예뻤다. 저것도 꽃이라니. 몸이 점점 뒤로 쏠렸다. 벽을 짚은 손에 무게가 실린다. 점점 감당 못할 무게다. 이대로 곧장 무너지면 뒷머리가 바닥과 부딪칠지 모른다. 아, 눈앞이 핑 돌며 아뜩해진다.

이게 뭔 꼴이로... 이대로 뒤로 처박히면 매란도 없제 누가 좀 잡아주게!......

소리는 울림통을 통과하지 못하고 목안에서 맴돌았다. 그때 작은방에서 나오던 김 서방이 눈을 크게 뜨고 달려온다. 한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던지고 냅다 달려든다. 한발 두발... 사이에 늦었다 싶을 찰나 김 서방의 한쪽 팔이 장모의 등짝을 잽싸게 받친다. 거의 바닥으로 발랑 떨어질 상체가 덜컥대며 멈췄다. 하늘도 따라 빙글 돌다 멎었다.

뭐하십니까, 큰일 나게...

김 서방은 장모에게 말할 땐 사투리를 꼬박꼬박 쓰느라 애쓴다. 서울말을 쓰면 장모가 두세 번씩 되묻기 때문이다. 방금 급한 상황에서도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걸 보니 장모의 마음만 급했지 김 서방에겐 대처할 만한 시간이 있었는가 보았다. 서슬에 뒤를 돌아본 딸이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엄마, 천천히 다녀야지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냐 인자 괘안타 괘안해...

장모는 미안한 표정이 되어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김 서방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까보다 많은 나비가 팔랑팔랑 화단 주변을 날아다닌다. 얼룩무늬는 한 마리만 보이고 노랑나비 감물 들인 주황색 나비가 이 꽃 저 꽃 기웃대며 주둥이를 박았다 뺐다 한다. 저녁 만찬인가. 좁은 화단에 나비들의 날갯짓에 바람이 인다. 살랑살랑 물결치듯 허공을 흔들고 바람결을 밀어낸다. 코끝에 나비가 불어낸 향기라도 묻은 듯 둘째가 손바닥으로 눈을 쓸며 일어선다.
저녁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머리 굵어지면서 장인은 밖으로 떠돌았다. 장대한 기골과 잘생긴 얼굴로 근동 타처의 처녀들을 후렸다. 후렸다기보다 여자들이 졸졸 따라붙었다. 타고난 손재주로 무슨 일을 하건 척척 해냈다. 건축일 막일 목수 미장이로 팔도를 무른 메주 밟듯 돌아다녔다. 서너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그렁그렁한 눈물밥을 지어 쓸쓸한 손주에게 먹였고 손주는 새벽이면 바람처럼 사라져 소식이 끊어졌다. 애가 탄 할머니는 손주가 제대한 날 백리 밖에서 얻은 신붓감을 데려왔고 배추 꼬랑지 만한 살림을 맡겼다. 댐으로 수몰된 마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장인에게 시집온 신부는 작은 키에 동그란 눈을 가진 말수 없는 여자였다. 신혼살림이라곤 까맣게 탄 무쇠솥과 이불 한 채가 전부였고 그나마 신접살이 두어 달 뒤에 신랑은 예전처럼 집을 나가 다시 품팔이로 떠돌았다. 남은 두 여자는 뼘 뙈기 땅을 부치고 살았고 첫째 딸이 태어나고 할머니가 죽었다. 남편이 돌아와 장사를 치르고 말똥말똥 제 아비 바라보는 딸아이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집을 나갔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남편이 들어올 때마다 아이가 생겼고 아내는 혼자서 아이를 낳고 키웠다. 산비탈 가시밭에서 아카시나무 베어다 불을 땠다. 나뭇단을 굴리다 함께 구르기도 여러 번이었다. 손발은 점점 거북 등짝 되었다. 나물 보따리이고 장에 나갔고 오지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녔다.

손이 귀한 집의 아들은 딸 셋이 태어난 다음에 얻었다. 이번엔 내리 아들이었으나 막내아들은 돌 지나고부터 어딘지 모르게 비영비영 아프기만 했다. 딸들이 학교 다니면서 남편은 역마살이 풀렸는지 집에 눌러살았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삯일이라면 부르는 대로 달려갔다. 잠시 잠깐 아내도 방글거리며 엉덩이 불나게 나물 캐고 고추를 땄다. 커가는 세 딸도 엄마를 따라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봄에는 저녁마다 나물을 씻었다. 여자들이 뜯은 나물이 샘터에 푸른 산처럼 쌓였다. 팔다 남은 건 쌀을 섞어 나물밥을 해 먹었다. 푸른 고추밭에 붉은 고추가 출렁이면 지겨운 줄 모르고 땄고 측간 옆에 지은 광에다 연탄불 피워 말렸다. 고추 뒤집으러 문 열 때마다 더운 김이 몰칵 끼쳤고 매캐한 연탄가스가 목을 찔렀으나 행복했다. 서방에게 사랑 좀 못 받으면 어떠랴. 아이들 걱실하게 크고 몸 움직여 돈사는 고단한 일이라도 살아 있는 하늘이 서럽지 않았다.

살면서 딱 한 번 친정엄마가 다녀갔다. 버스 갈아타고 폴폴 흙먼지 마시며 어스름 저녁에 찾아온 딸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친정엄마는 이런 시골구석에 어찌해서 날 시집보냈냐는 숨죽인 딸의 지청구를 눈물로 듣고 한숨만 쌓아놓은 채 새벽 걸음으로 떠났다. 그때 어린 둘째 딸은 엄하게 보이는 외할머니 치마폭에 앉지도 못하고 배돌다 잠들었고 다음날 할머니의 부재를 확인했다. 외할머니 앉은자리에 사탕 봉지가 무뚝뚝하게 놓여 있었다. 학교가며 이슬 젖은 벼메뚜기 신나게 주워 담던 늦가을 아침이었다.


내가 죄다.

내가 죄라면 태어나 너희들 낳아 기른 게 죄다. 언제나 늙지 않고 꼿꼿한 허리와 투명한 정신으로 청청하게 살아야 했다. 우렁한 잎들 키우고 넓고 튼실한 가지 뻗어 땡볕과 비바람 막아주고 인자한 미소와 너른 품으로 끝까지 보듬어야 했다. 너희들은 커서 제가끔 떠나 영토를 넓히거나 키웠지만 늙어가는 게 죄인 나는 시골 구석에서 감자를 캐거나 고추를 따다 말렸지. 몸은 자꾸 쪼그라들고 눈은 침침해졌다. 나의 영토는 장날이면 일 없어도 나가보던 읍내조차 줄어들어 차 타고 멀리 가본 지 오래되었지. 촉촉하고 두툼하게 썰어 널었던 무가 가느단 말랭이가 된 것처럼 내 땅은 한 뼘 어두운 하늘 아래 졸아들고 말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땅강아지처럼 거두고 말려놓으면 너흰 차를 끌고 와 식용유랑 참치세트를 던져주고 시렁과 고방 탈탈 뒤져 바리바리 싸들고 떠났어. 겨우내 까치도 쳐다보지 않아 찬바람에 얼어 말라 터진 고욤나무 열매처럼 자꾸 오그라들었지. 늙은 게 죄다. 늙지 않고 푸르게 살다 급냉시킨 얼음 꽃처럼 느닷없이 떠났어야 했다. 아비처럼 환갑도 먹지 못한 나이에 자는 듯이 떠나버린 게 얼마나 부럽던지. 늙지 않을 수 없다면 정신이나 몸이 젊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게 죄다. 밭을 맬 수도 올바른 판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잔걱정은 꼬리를 물고 주렁주렁 매달리고 잔소리는 맘에도 없이 튀어나오고 이리 던지고 저리 맡기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분란만 키우는 짐짝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내가 살던 방식과 너희 사는 방식은 세월만큼 변해버려 뭘 해도 너희완 딴판이고 더럽고 지저분한 늙은이가 되었다. 창피하다. 뭘 더 얹어봤자 사는 건 다 창피한 일이다.

입으로 빨던 숟가락으로 흐트러진 쌈장 보기 좋게 매만져도 화들짝 놀라 소리 지르고 손가락으로 반찬 집어 맛봐도 더럽다고 눈 흘기고 먹던 물 아까워 쌀 씻는데 부었다고 잔소리하는구나. 화장실 볼일 보고 깜빡해서 물 내리지 않았다고 꼬박꼬박 잔소리하는 김 서방도 그렇고 단 게 당겨 사탕 감춰놓고 무시로 까먹으면 살찐다고 잔소리하고 몸에서 냄새난다며 빨래 자주 내놓으라고 잔소리 밥 먹자마자 누워 있는다고 잔소리 난 아조 어린 네가 되었구나. 살아 너희들 걱정만 키우는 내가 진짜 죄인이다.

장모는 장모 대로 살아 있는 게 죄라고 생각되었다. 환갑인 김 서방은 작년 초겨울부터 올해 늦봄까지 산불감시원을 하다 여름 내내 놀았다. 마음 놓고 놀았다기보다 뭐라도 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답답한 촌구석에서 맞는 일자리는 선뜻 나타나지 않았다. 눈치 볼 것도 없지만 매일 아침 도시락 챙겨 일 나가는 아내의 눈치를 살필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느적느적 책이나 펼치고 졸리면 졸린 대로 낮잠 투성이다. 마당 개는 병원에 다녀와 아침저녁으로 통조림에 약 섞어 먹더니 부쩍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흠이라면 똥을 누지 않았다. 약 성분에 변비를 유발하는 성분이라도 든 걸까. 김 서방은 마당에 나갈 때마다 수시로 개를 살핀다. 그걸 보는 장모의 심사가 마냥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개란 집을 지키거나 보신용으로 식용하는 고기라는 개념이 박인 장모의 입장에서 김 서방의 행동은 마뜩잖았지만 여느 집처럼 방안에 들여 물고 빨고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러나 개는 개답다는 말에서 '-다운' 건 상대적인 생각일 수밖에 없다.

사위는 사위대로 생각이 많다.

생각해보면 세태에 뒤떨어져 살았다는 게 점점 뚜렷해진다. 열심히 살았어도 이만한 나이 모아둔 동산 없고 처가 동네 시골집 수리해 사는 게 전부다. 쥐꼬리 만한 연금은 공과금으로 월마다 흔적도 없이 꼬박꼬박 사라지고 먹기 위해 꾸역꾸역 일을 찾아야 한다. 무얼 이루겠다는 욕심도 없지만 살아가는 소소한 낙 없으니 무연한 일상만 공기 채우듯 하루하루 부풀었다 맥없이 빠졌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독서가 유일한 낙이다. 멀리 사는 여자 남의 속 알 리 없고 타자성의 거울만 몰아치듯 비춰대니 눈부셔 난망한 꼴이다.

텔레비전 보면 먹고살고 환장한 사람들 맛난 것, 가고 싶은 여행지 찾아 지구 땅덩어리 구석구석 이 잡듯 쑤시고 다닌다. 정말 목적 없는 우주에서 즐기기 위해 사족 못 쓰고 오금 저리다 못해 발랑 까진 이 편한 세상 즐기며 떨고 있는 꼴이다. 그러나 삶은 뒤죽박죽이면서도 공평한가. 한쪽에선 빛나는 인생의 정점을 맞고 있지만 한쪽에선 죽지 못해 목숨 이어가는 사람들 생을 연명한다. 가난의 구조 대물림되고 국가의 정책이란 건 영원한 헛손질이다. 흔들리는 개인과 온기 없는 공동체를 버티는 그들에게 내어줄 빈손과 울림 없는 공허한 말은 짐이 될 뿐이다. 나조차 점점 짐짝으로 변해간다. 그대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목숨이다.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우물대다가는 복지의 시혜 염치 눈치도 없이 쪽쪽 빨아 처먹는 쓰레기 같은 존재로 변해 간다. 치워버리고 싶어 안달 난 젊은 시선에 쫓겨 남루한 말년 보내느니 당당하게 떠나야 한다. 장모를 보라. 망가진 정신 움직이지 못하는 걸음으론 이미 늦다. 한 뼘 만한 근력과 정신 남아 있을 때 더럽고 누추한 땅 벗어나야 한다. 식물과 생태가 그럭저럭 숨 붙이고 사는 하늘과 땅 찾아야 할 때다. 참고 사는 게 지혜라면 수모는 마지막 자존감. 무엇 이룬다고 추잡한 거래로 질척한 땅 칠갑하나. 가족은 살길 찾아 흩어지고 삶의 신념은 한낱 휴지조각도 못 되는 고집으로 굳어지는 현실에서 이제 놓여날 때가 된 거다. 절핍의 자유는 양심이고 신념이다. 성가신 차 버리고 얄팍한 보험 팽개치고 하루 살아도 평온한 보짱으로 공정한 삶의 말년 살다 가야지. 살다 보니 공정한 건 생사의 적멸밖에는 없었지만. 나를 나타내고 보장하는 건 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락사락 사-락사-락

발 끄는 소리가 났다. 하나는 늙은 개가 마당을 가로질러 잔디에 오줌 누러 가면서 시멘트 바닥에 긴 발톱이 긁히는 소리고 하나는 장모가 화장실에 가면서 장판 바닥에 발 끄는 소리다. 시계를 보았다. 점심 때다. 김 서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박죽 한 그릇과 도시락 밥 그리고 고구마 줄기 무침이 점심상이다. 딸은 막내가 준 단호박을 갈라 찹쌀가루 넣고 죽을 끓여 점심에 먹는다며 싸갔다. 덕분에 김 서방이 퍼놓은 도시락 밥은 김 서방이 먹게 되었다. 부시럭대더니 김 서방이 냉장고 위칸에서 뭔가를 꺼내 밥에 섞는다. 비벼먹는 양념 부비또다. 호박죽을 뜨던 장모가 앞섶을 만진다. 노란 죽이 떨어졌다. 그대로 무늬 같다. 김 서방이 휴지를 죽그릇 옆에 놓아준다. 벌어진 방충망 틈으로 들어온 파리가 죽그릇을 핥는다. 장모는 눈치채지 못하고 연신 옷에 묻은 죽을 닦느라 애쓰는 중이다.

며느리와 시매부인 김 서방이 다툰 이후 아들 내외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올 추석까진 한 달 가웃 남았다. 그러니 모르긴 해도 명절 때는 각자 명절 판국이다. 고성과 욕설이 오간 상황이 벌겋게 익은 홍시처럼 물러터지길 바라는 건 시기상조일 거였다. 그나저나 김 서방은 말복 무렵 처남의 텃밭에 심은 김장 배추와 무가 마음에 걸렸다. 기껏 모종과 씨 사다 심어놓고 땅내 맡아 기운차게 올라오는 파릇한 배추 잎이며 무싹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배추 못 구해 김장 못할 리는 없다. 채소 값에 따라 밭에 널브러진 채 썩어가는 흔해빠진 배추 무보다 일그러진 처남 네와의 관계 회복이 걱정인 거다. 처남이 그날 집에 돌아간 뒤 누나와의 통화에서 인연 끊고 살자고 뱉은 말도 술 취해 홧김에 한 말일 터. 지금은 처남도 처남댁도 관계 회복의 출구를 모색 중이리라. 김 서방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툰 다음날 김 서방 쪽에서 카톡으로 사과의 문장을 보낸 터라 내심 저들의 분한 감정이 눅기를 바라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다툼은 동기 간이 아닌 바깥에서 들어온 사위와 며느리가 점화했으나 감정의 골은 처형과 처제, 둘째의 시누이들과 며느리와 처남이 갈린 형국이었다. 아들 하나 있는 집에서 며느리가 무슨 죄인가. 형편상으로 처형과 처제가 장모를 돌아가며 모실 수 없다면 이사 온 둘째도 있고, 직접 엄마를 모시지 못하면 물심으로라도 며느리인 올케의 마음고생을 헤아려야 했다. 물론 드러나지 않게 며느리의 노고를 알아주긴 했지만 당자인 올케로서는 기약 없는 시어머니 수발에 점점 지쳐갈 무렵이었다. 제아무리 공치사로 추켜세운들 수발의 짐을 덜어내는 만큼 날아갈 듯한 자유는 없으니 말이다. 며느리가 아무리 잘해도 두터운 감정의 주름이 굳어버린 저녁 굶은 시어미의 얼굴이 펴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꿰고 있던 김 서방은 처남댁의 고충을 충분히 헤아렸다. 말로나마 처남댁을 위로하던 사이였지만 불뚝성이 있던 김 서방의 성정으론 그날 처남댁의 발끈한 행동을 참기 어려웠다. 독작한 술기운도 상승작용으로 한몫했지 싶다.
욕이란 일상어와 달라서 쓴 약으로 치면 강한 충격 효과를 나타내지만 처남댁에게 쓸 언설은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장모는 사는 게 모두 짐이란 생각이 든다. 짐이란 지고 가면 무겁고 풀어놓으면 속이 환히 비치고 가볍다. 하지만 사회적 관습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고독이나 쓸쓸함도 소중한 인간의 감정이다. 고독사에 대한 존엄한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기란 모든 노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어려운 일이다. 일본 작가 사노 요코는 죽음 직전까지도 말년을 보내며 지인과 자신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유쾌하게 묘사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확신하는 사람도 삶의 과정의 하나인 죽음이 닥치면 두려운 법이다. 장모는 요양등급이나 조현병 증세로 인한 장애등급 둘 다 적용을 받지 않은 상태다. 사회보장제도가 전적으로 자녀의 부담을 덜어주지도 못한다. 중증 장애노인의 경우 시설에서 생애를 마치게 되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죽을 자리'를 선택하는 것 또한 노인의 몫이나 현실은 집보다는 병원에서 죽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문어발 같은 의료 장비를 온몸에 꽂은 채 말이다.

이번 생이 망했다고 다음 생이 좋을 거란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행복의 개념은 과거엔 자기만족이라고 했다. 만족은 도둑놈도 착한 이도 한다. 마빡은 이십구 만원에 째진 눈깔은 집 한 채에 만족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몸무게가 아닌 영혼의 무게를 잰다면 저울이 비웃을 것들이다. 행복이란 현재의 인간관계다. 그런 면에서 김 서방은 낙제고 장모는 평균이고 둘째는 우수한 편일 거였다. 사위는 늘그막에 와서 일체의 인간관계를 끊고 살다시피 하고 장모는 들판에서 시들어 가는 고목처럼 모두의 시선을 받을 테고 둘째 딸은 일과 종교와 동기간의 관계에서 원만한 편이니 말이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둘째가 막걸리 두 병을 비닐봉지에 사 왔다.

식탁 위에 부침개와 막걸리 소주병과 잔 세 개가 놓였다. 장모가 얼굴을 찡그리며 소주잔의 막걸리를 마신다. 아, 새그럽다... 딸과 김 서방이 술잔을 들다 마주 보며 웃는다. 엄마, 한잔 더 줄까? 재미있단 표정으로 딸이 부침개를 찢는다. 한잔 더하세요, 어머니... 김 서방이 부침개 조각을 간장에 찍는다. 그래 한잔 더하까..
장모의 하얗게 센 파마머리가 양떼구름같이 생겼다.
문득 논두렁길로 수건 흔들며 사과 따러 가던 젊은 장모의 뒷모습이 김 서방의 머리에 스쳤다. 불콰하게 단풍 물든 사과 이파리가 가을볕 사이로 물결친다.

(끝)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직업훈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