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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by 소인


올갱이국은 맛있었다.
주인은 더 있으니 많이 드시라고 권했고 주인의 그 말이 아니라도 오래간만에 먹는 올갱이국은 정말 감칠맛 났고 입과 혀끝에 착착 달라붙었다. 올갱이국은 무시래기보다 배추 우거지가 어울린다. 얼갈이배추를 데삶아 넣어도 좋다. 된장을 풀어도 좋은데 이 집에선 경상도식으로 들깨가루를 넣어 끓였다.

올갱이를 잡는 일은 수고롭기가 자심하다. 마을 앞 맑은 개울에서 종일 허리 구부려 잡아다 해감한다. 흙과 모래를 뱉어낸 올갱이를 박박 문대 씻은 다음 끓는 물에 한소끔 데친다. 데삶은 올갱이 살을 이쑤시개나 옷핀으로 꺼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끝 부분의 뚜껑처럼 생긴 딱지를 떼어내고 살을 찔러 살살 돌려 빼내야 살이 잘 빠진다. 모아논 살을 얼려 보관했다가 우거지 넣고 끓여 오늘 저녁에 초대한 거다. 노루꼬리 만한 해가 서둘러 넘어가고 자박하게 어둠이 깔릴 무렵 모인 사람들 달기작이며 올갱이국 뜨는 소리가 구수하게 퍼진다. 훌훌 뜰수록 훈김이 퍼지고 온몸의 내장 헤실하게 녹아난다.

올갱이의 표준어는 다슬기다. 강원도 충청도에서는 올갱이라 부르고 경상도에선 고디, 전라도 지방에선 대사리라고 한다. 평지 하천에 주로 살고 모래나 호박돌 틈에 숨어 물 흐름이 좋은 돌에 붙어 짝을 찾아다닌다. 허파 디스토마의 중간 숙주로 알려졌으나 요즘은 약이 좋아 문제 되지 않는다. 다슬기를 항아리에 넣고 거꾸로 세워 왕겨를 태워 얻는 진액은 간에 특효다.

맑은 전국의 하천에서 여름마다 기역자로 구부리고 물속을 들여다보며 올갱이를 잡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다. 주문진 살 적에 소금강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물길에서 올갱이를 잡곤 했다. 스노클 장비를 갖추고 물고기처럼 헤집으며 잡았다. 큼직한 놈들은 한 길 아래 어두컴한 바위 근처에 모여 있었다. 더위를 식히며 올갱이 찾아 물 바닥 더듬는 재미를 즐기곤 했다.

주인이 차린 밥상은 하나하나 맛깔스럽다. 오갈피 장아찌, 말린 톳 무침, 깻잎장, 파김치 푸른 무침 나물 등이 정갈한 전라도 밥상 닮았다. 초대받은 손은 모두 여덟 사람. 나이 든 내외와 젊은 부부도 함께 머리 맞대고 구수한 올갱이국을 맛나게 먹었다. 사락사락 부드럽게 씹히는 우거지와 쫄깃한 올갱이 살이 입안에서 머물다 목구멍으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삶의 도락 중 하나인 섭생은 좋은 사람과 함께할 때 즐거움은 커지는 법.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이나 오늘 처음 본 사람도 밥상을 마주하며 허물없는 대화가 오간다. 함께 먹는 밥은 삶의 어울림이고 교환이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같은 종교를 가진 교인들이다. 난 종교에 상관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그들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신념, 경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이 좋았다. 하지만 내게 그들의 종교를 권할 때면 완곡하게 때로는 정색하며 고사했다. 내겐 실천의 의지는 물론이고 성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무소불위하며 전지전능한 절대자인 유일신이 내려다본다면 불완전한 인간의 불가능성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잘 어울린다는 건 물색없기보다 통제와 경계에 속박되지 않겠단 의지의 다른 표현이었다.

일체의 번민을 떠난 평온한 식사는 평화로운 삶 자체다. 저녁을 먹는 동안 난 정초부터 곡기를 끊은 나라를 잠시 잊었으며 일신의 상황에서 비롯한 자잘한 일상사를 까먹었고 생로병사와 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범죄, 미움과 싸움, 영육이 결핍된 삶의 눈물과 번민까지 죄다 잊어버렸다. 마약이 국부에 대한 진통과 고통에 대한 일시적 상실이라면 흔쾌히 마주한 따듯한 밥상도 그에 버금가는 마약 같은 것이다. 대화는 밥상을 차린 주인의 정갈한 손맛에 대한 칭송과 먹거리에 대한 기원과 조리법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땅의 오염과 먹을 것에 대한 걱정으로 얘기가 쏟아진다.

예전에 물과 공기 햇볕은 자원의 개념이 아니었다. 무한대로 주어진 자연환경은 인간이 누리고 사는 말 그대로 공짜의 물성이었다. 산과 강 바다에서 인간이 취한 물산은 삶의 복락을 누리는 데 봉사하는 상대이면서 인간에 비해 하위 개념이었다. 사고하고 상상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은 만물에서도 으뜸이며 문명과 문화는 인간만이 건설하는 지고의 선이다.

인류 공동체는 개발과 발전을 거듭하며 잘 사는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문명과 문화는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부작용을 거듭했다. 전쟁과 난민, 기아와 질병은 인간사의 일상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약육강식의 승자 논리를 앞세우며 생존을 위한 결핍의 고통을 모른 체한다. 아니 애초에 그것의 생리는 자비나 연민이 아니다. 만족을 모르고 앞만 향해 살찌우는 거대한 괴물이다.

생태 오염은 목전의 과제로 다가왔다.
인간은 땅과 강을 오염시키는 약탈 농법으로 작물을 생산한다. 대량 소비를 감당하느라 축산도 대형화한다. 가축의 분뇨는 땅으로 스며들어 지하수와 강을 더럽히고 바다로 흘러든다. 화학비료와 질소 퇴비는 강의 녹조화를 부추긴다. 어족 자원의 남획은 치어까지 싹쓸이한다. 일본 타이지의 돌고래 사냥은 사냥이 아니라 학살이다. 맞아 죽은 돌고래의 피가 바다를 물들인다. 자원 감소만 문제가 아니라 중금속에 오염된 물고기가 식탁에 오르는 건 막을 수도 없는 현실이다. 산을 뚫어 길을 내고 집을 짓는다. 물 맑고 풍경 좋은 산골짝의 땅값은 치오르기 바쁘다. 내일의 오염은 내일의 일이고 바람 타고 국경을 넘나드는 미세먼지는 책임질 일이 아니다. 맹그로브 숲을 파괴하고 별장을 짓자 쓰나미로 인명을 휩쓸어 가도 무감각하다. 소비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자본의 괴력에 모두 속수무책이다.

사색하지 않는 삶의 가치관은 세상의 가르침이다. 의미와 목적도 불분명하게 남들의 가치와 욕망을 좇는 삶은 더 잘 살기 위해 밤낮없이 달릴 뿐이다. 현대의 불안과 공포를 먹이 삼아 자본은 인간을 철저히 노예화한다. 소득의 격차는 빈부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기업은 국가 정책을 조종하고 지배한다. 젊은이는 꿈을 포기하고 노인은 지레 생을 마감한다. 땅의 왕국을 주장하는 사반의 십자가 아래 지상 낙원은 가뭇하고 사는 게 생지옥이다.

종교인의 귀결은 경전의 믿음이다. 기도교적 내세관에 근거한 현 세계의 종말과 낙원의 도래는 신이 구현하는 인간 구원이라는 확신 말이다. 지구 상에서 벌어지는 저간의 사정도 인간이 벌이는 탐욕의 현장이다. 궁구 할수록 거기에는 희망의 빛조차 묘연하다. 원죄로 인해 신의 세계에서 이탈한 인간의 근원적 존재는 태생적으로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목적은 원래의 낙원에서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히 현세의 신은 황금 의자에 앉은 자본이라는 괴물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묘비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라고 새겼다. 무위의 삶을 너머 무무 위의 삶은 가능할까. 자유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불가해한 존재고 삶조차도 그렇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은 "이제 확실해졌다. 아이는 착하게만 키워선 안된다. 똑똑하게 키워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교양인인 성인은 많다 그러나 지성은 드물다. 같은 맥락이다. 섭세의 처세술인 상식과 교양은 단기처방과 같다. 생명공동체인 자연과 숲과 강, 그리고 동식물과 인간을 아우르는 지성은 장기처방이다. 교양 치레보다 지성인이 되어야 삶을 누린다."라고 했다. 오래전 시인은 사색하는 삶 속의 지성을, 지속 가능한 생태적 삶을 갈파했다. 종교의 신념과 인간의 의지 사이에서 대화는 평행으로 끝을 모른다.

만족한 식사와 유의미한 만남을 접고 일어선다. 칠흑이 묻어날 것 같은 밤공기가 차갑게 끼친다. 유기 마을로 이름난 동네 초입의 느티나무 그늘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섰다. 밤의 검은 장막이 길 위로 기름하게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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