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 (29)

공정과 상식이 거론되는 사회.
위계를 떠나 인간의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 일반적 지식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란 얼마나 살만한 세상인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이해되는 가치를 저마다 핏대 올려 주장한다. 가만히 보니 공정과 상식이 각자의 위계와 공동체 내에서의 가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유토피아처럼 불가능한 개념이다. 지식인 지도층 정치꾼 판검사 대기업 부유층 택배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교사 농부 뱃사람 광부... 한쪽의 공정과 상식을 다른 쪽에게 강요하는 거였다. 그러니 싸움은 그치지 않을 판국이다. 공정과 상식이 권력으로 작동하면 차별이 발생한다. 차별은 맥락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일테면 공부 잘하는 범생이는 친구들 모임에서 제외된다는 식으로. 차별은 역사가 깊어 문화인류학으로 설명해야 될 정도다. 장애•비장애, 성차별은 뿌리가 깊으며 국가가 생기면서 국민•비국민의 차별 위계가 생겼다. 차별은 단순히 공동체로부터 내침이 아니라 민족 간 차별은 학살과 전쟁을 낳기도 한다. 차별은 인정 욕구와 함께 생존의 수단으로 발전한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차별하지 않으면 내가 도태되는 현실에서 누구라도 자유롭지 못하다. 차별을 붙이지 않고 편안한 낱말조차 없어 보인다.

차이는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또는 그런 정도나 상태'를 뜻하고,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하는 걸 말한다. 차이를 차별한다는 건 다름을 다양성으로 보지 않고 위계를 매겨 차별한다. 이쯤이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습속에 의해 무의식에 각인된 차별 의식을 어찌해야 하는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각성하고 고치는 수밖에 없다. 성별, 직업, 학력, 나이, 지역, 사랑, 피부, 국가, 언어... 차별이 없는 것은 없다. 차별이 상존하면 차별하는 상황이 보이지 않는다. 불가시화된 차별의 상황이 산소처럼 퍼져 있다. 차별이라는 단어를 빼고 세상을 보는 게 불가능하게 되었다.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의 핵심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말함이다. 그런데도 종교의 차별을 들고 나온 건 후대의 사람들이었다. 죽어서도 등급에 따라 묻히는 차별은 뿌리가 깊어 할 말을 잃고 만다.

인간과 동물은 어떨까.
동물과 자연은? 동물은 인간의 소용을 위해 죽이고 이용하는 대상이다. 여호와는 창세기에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했다. 그럼 자연과 동물에게는 고통에 대한 권리가 없을까.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을 제외한 여타의 존재를 대상화한다. 정복하고 다스려 인간을 이롭게 하는 대상이란 면에서 자연은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동물은 원시의 사냥에서 집단 사육으로 바뀌었다. 유엔 식량기구(FAO)의 조사관이었던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현재 생산하는 식량은 지구 전체 인구의 두 배(140억 명분)를 먹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곡물의 50%를 사료로 소비한다는 현실은 굶어 죽는 사람을 철저히 외면하는 정책이다. 남아도는 식량을 보내자니 거기에 드는 비용이 필요하고 설사 보낸다 하더라도 부패한 정권은 소수의 배만 불리기에 바쁘다.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매하는 미국은 겉으로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격 중지를 요구한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의 모순을 뻔뻔하게 내지른다. 이 정도면 공정과 상식의 가치는 순전히 자신의 합리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공정과 상식에 권력을 덮어씌우는 자는 그것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동물 권리 운동가 피터 싱어는 '대부분의 동물 권리론자가 주장하는 형평성이란 동물에게 인간과 동일한 권리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이 비슷하게 갖고 있는 이해관계를 공평하게 존중하자는 것이다. 고통만 있고 그것에 상응하는 혜택이 없다면, 그 어떤 경우라고 해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고통의 주체가 어떤 종인 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동물의 이익에 대해서도 인간의 이익에 표하는 것과 같은 존중을 표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공정과 상식의 가치를 지구 상의 모든 생태적 개체에게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동식물, 바람과 햇빛, 구름과 공기는 존재의 움직임 자체가 의미인 것이다. 쾌고 감수능력(快苦感受能力)을 기준으로 보전과 탈락을 따지는 것도 위험한 생각이다. 캣치 앤 릴리즈를 구호로 삼는 계류 낚시꾼의 손안에 든 산천어는 화상의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은 손맛을 즐기고 자연으로 돌려줄 뿐이라고 으스대며 즐거워한다. 사악하고 졸렬한 인간의 생각은 끝이 없다. 시민과 아동을 학살하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공정과 상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삼겹살을 뒤집으며 가시 돋친 생각을 굽는 난 누구를 책망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 기반한 미래는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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