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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by 소인

놀이

밥에 간장만 비벼도 맛있었다. 일터 간 아버지 놀러 나간 엄마 큰형은 밥 끓이고 형제들은 석유곤로 주위에 감자알처럼 모여들었다. 늦은 밤 엄마가 돌아오고 술 취한 아버지 들어왔을 때 우리는 눈감고 자는 척했다. 모든 게 평온했다. 입안에서 간장과 마가린과 밥알이 부딪치며 빚어낸 고소 짭짤한 미각이 오래 맴돌았다. 어릴 땐 모든 게 신기하고 새로웠다. 특히 금지 명령인 '하지 마라'로부터 자유로운 , 금지를 넘어서는 금기의 초월에 깃든 자극과 충동감은 지금 생각하면 쾌락과 맞먹는 자극이었다.

철조망을 뚫고 포로가 탈출하듯 금지된 행위를 실천하며 세상엔 하라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에 재미와 비밀이 숨은 걸 알아갔다. 어른은 아이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애썼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입한 대로 움직일 것을 바랐다. 큰형은 충실한 조감독의 역할을 맡았는데 어떤 땐 큰형조차 지시의 선을 넘어 도주했다. 우리들은 바람 든 무처럼 들판을 쏘다녔다. 날아가는 참새에게 돌을 던지고 물속을 뒤져 가재를 잡아냈다. 돌무덤을 무너뜨려 뱀굴을 찾아 한 마리씩 대가리를 짓이겨 죽인 뱀의 사체를 미운 아이 집 돌담에 죽 늘어놓았다.

쌀쌀한 바람에 얼굴이 트고 손등 갈라져 피가 나도 우리들의 모험은 즐거운 인생 자체였다. 하나둘 세상이 떠미는 길로 떠나 홀로 남은 지금 난 오래된 기억을 가끔 들추며 놀이의 원형과 삶의 금기가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곰곰 생각한다. 놀이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잠자리 날개를 떼고 꽁지에 밀짚을 박아 날리면서도 죽음에 대해서 초탈했다. 선악의 개념 없는 놀이는 태초의 인간이 즐기던 놀이의 모습이었다. 선악과 미추를 초월한 놀이였다. 잔인과 자비와도 무관했던 놀이가 차츰 시들해진 건 아이들의 발목이 어른처럼 굵어지면서부터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막대기와 돌멩이를 손에서 버렸다.

삼겹살과 음주, 노래방과 고스톱이 놀이 문화 주류를 탄 건 이후다. 도시의 골목에서 개울가에서 고기를 구워 연기를 피웠으며 화투짝과 트럼프를 손에 쥐고 패를 가늠했다. 어떤 인간들은 배터리로 물속을 지져 둥둥 떠오른 물고기를 건졌고 사냥총을 들고 숲을 뒤졌다. 놀이는 대상의 숨통을 끊거나 대상을 희롱함으로 절정의 쾌락을 보상했다. 놀이의 유의미를 찾는 건 무의미했고 그저 돈과 시간을 투자해 원시의 잔인성을 즐길 뿐이다. 더 나아가 마약과 도박 중독은 자아를 망실한 극한의 체험이다.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요즘은 일부러 아침 시간에 집을 나서지 않는다. 아직 바람은 차도 낮의 볕은 따스하다. 읍내를 가로질러 내성천 둑길을 달릴 무렵이면 목에 두른 넥워머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다. 읍을 통과하며 흐르는 천변 고수부지는 일 년에 두 차례 축제가 열린다. 한여름의 은어축제와 가을의 송이축제 때는 작은 읍이 들썩댄다. 펑펑 터뜨리는 불꽃놀이와 밤늦도록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잠을 설칠 정도다. 모텔 여관은 만실로 북적이고 식당 술집에선 자정 넘도록 연기를 피워낸다.

겨울과 봄은 고요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한데 난 이런 풍경을 즐긴다.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 공사장 흙을 나르던 덤프트럭이 구석에 졸고 있는 모습이 좋다. 갈수기의 개울은 발목을 적실만큼 깊이로 흐르고 보 아래 물이 모이는 곳엔 오리 떼가 뒤뚱거리며 물을 젓는다. 잎을 남김없이 떨어뜨린 버드나무 물가를 조용히 내려다본다. 개울 건너 게이트볼장에서 사냥 모자를 쓴 노인 서넛이 채 휘두르며 느릿느릿 공을 따라간다. 별로 할 일 없어 보이는 순찰차가 편의점 앞에서 좌회전하려는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라이딩 앱을 켰다. 오늘은 이십 킬로를 달리기로 한다. 단잠 같았던 안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월부터 오월까지 산불 감시다. 남도 여행도 다녀왔으니 다음 여행까지는 일에 몰입한다. 초여름이면 가벼운 침낭 하나면 어디든 한둔이 가능하니 자유로울 거다. 내륙으로 내려가 지리산 둘레를 도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눈에 드는 맞춤한 마을이 나타나면 하룻밤 묵어도 좋으리라. 마음 푸근한 이를 만나 안내를 받으면 마을의 내력도 물어보고 살 만한 빈집이 있는지 알아보리라. 속내의 바람이라면 지리산 아래쪽 하동 방향이 적당한데. 방향은 어디로 튈지 누구도 점치기 어려운 게 인생이다.

은어 공원부터는 천변 양쪽으로 둑길이다. 이 키로 앞의 분뇨처리장이 있어 골골이 다니며 똥을 배불리 채운 분뇨차가 오가는 외엔 차가 뜸해 걷기나 라이딩엔 알맞은 코스다. 주행거리를 가늠하며 두릉골을 지나 돌아오거나 천변 둑길을 몇 바퀴 돌아도 무방하다. 이젠 아프던 허벅지 근육도 풀렸다. 한 달 넘게 자전거를 타니 길이 든 모양. 어지간한 경사도 내리지 않고 달린다. 장족의 발전이다. 그래도 교만은 금물이다. 체력 향상은 바라지 않고 현상 유지만 기대한다. 자전거도 몸에 길들여졌는지 원하는 속도와 방향에 무리 없이 따른다. 이어폰으로 부드러운 음악이 나온다. 한낮의 기운이 푹해서 운동 나온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아홉 시 십 분에 부전역을 출발한 기차가 역으로 들어서는 게 보인다. 좀 더 달리면 동해의 짠물 만나리라. 십오 년 동안 눈에 시푸른 멍이 들도록 보고 살았던 동해. 쓰고 짭짤한 기억이 물 바닥에 묻힌 곳. 점점 기억도 실처럼 끊어진다. 망각이 없다면 인간의 기억 세포는 진작에 터지고 말았을 거다. 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사건은 수십 년이 지나도 어제처럼 선명하지만. 얘기로 풀자면 그동안 각색되고 뜸 들인 기억은 풍성한 시나리오가 된다. 자칫 진실조차 무뎌지고 흐릿해져 종내는 시드러운 가십거리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면 젖은 별 아래 이슬 같은 이야기다. 해 뜨고 한 식경이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 그 속에서 사랑하고 보듬고 미워하고 저주하는 삶의 고투는 죽기까지 이어진다.

분뇨처리장 앞을 지날 때 숨 참는 버릇이 생겼다. 콧구멍을 벌름대며 맡아도 냄새는 나지 않는데도. 이곳에서 종일 일하고 들락거리는 사람은 뭐란 말인가. 연암 박지원은 '예덕 선생 전'에서 똥 치는 이를 가리켜 '하는 일은 불결하지만 그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더러우나 의를 지킴은 꿋꿋하니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랴. 이에 감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예덕(穢德) 선생이라 부른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부끄럽지는 말아야지. 처리장을 지나며 크게 숨을 마신다. 용담교가 보인다. 반환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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