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90)


내가 누군지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요즘 내가 읽는 책과 먹는 음식, 보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 만난 사람, 그와 나눴던 이야기 그리고 그대 사유의 질료가 바로 그대의 정체다.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보다 지금 하는 자잘한 일상이 당신을 말해준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던 풍경, 찬찬히 들여다보았던 대상이 당신의 거울이다. 굳이 당신을 설명하려 들지 마라. 남과 다른 어떤 게 그대의 진실일 수 있다. 숨기거나 포장하거나 sns의 '좋아요'의 불안을 배제한 소속감에 속지 마라. 소중한 당신의 삶은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으니. 세상의 종말은 곧 너의 죽음이니. 넌 누구냐? 난 나다! 你是谁?我是我!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한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성향의 인간인지 세상을 해석하는 인식은 자신이 '어떤 것'-생태종 인간성 존재성을 망라한-인지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사회는 거대한 구조로 된 단단한 벽이며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구조가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구조의 욕망 그물에 갇혀 산다. 불행하다는 생각 없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감을 느끼며 산다. 구조란 권력이다. 권력은 스스로 만든 질서에 대중을 포섭시키는데 질서에 복종하도록 순치시키는 게 권력의 목적이다. 힘을 가진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은 좌절한다. 신념이 꺾이면 굴종하는 수밖에 없다. 권력의 얼굴은 습속, 자본, 국가 심지어 공동체로도 나타난다. 권력의 지배 아래에서 개인의 자유는 영원히 유보된다. 권력이 인정한 자유만 허용된다. 애초에 인간에게 자유란 없었다. 태생 자체가 통제된 구조 안의 삶인데 자유가 존재할 리 없다. 진정한 자유는 상상 속의 관념이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은 혁명을 꿈꾸며 권력에 저항했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졌다. 궁궐을 떠나 고행을 선택한 싯달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택한 예수는 자비와 사랑을 좋은 소식으로 남겼다. 허균의 혁명 사상은 단두대의 칼날을 맞았고 독립을 꿈꾼 사람들은 감옥에서 들판에서 죽어갔다. 그들의 다디단 열매는 아주 늦게 열었는데 후대의 사람들은 간단히 따 먹고 소화했다. 오늘에 와서 혁명은 점점 복잡한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전면전의 양상이 온 것이다. 각개전투 식의 혁명 전은 분열과 희미한 연대와 공감을 불렀다. 반대로 권력을 무기로 기득권을 지키는 무리는 점점 교활하고 뻔뻔해졌다. 가짜 뉴스와 억지 주장으로 혁명 대열을 혼란시킨다.


혁명 내부에서는 반혁명 분자가 수시로 일탈을 시도한다. 기껏 일궈놓은 텃밭에 더러운 물을 끼얹는다. 그들도 사람이었으나 너무 나갔다. 아이언 맨처럼 완벽체를 요구하는 건 아니다. 순일한 정신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치더라도 하다 하다 꼴통의 짓거리를 따라 하는 데는 질려버렸다. 혁명이고 나발이고 오사리잡놈과 손잡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대중은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어디까지 믿어야 옳은지 헛갈리게 되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내 진정을 알아주십사고 지랄 떤 적 한두 번인가. 누가누가 좆같나 내기하는 꼴에 등 돌리는 사람 늘어간다. 그러면 그렇지. 체념과 냉소가 잉크처럼 번지고 권력 따먹기 하는 아사리판 구경도 신물 났다. 대가리 터져라 돈 벌 궁리, 이 풍진 세상 공알 빠지는 쾌락에 몰입한다. 연민, 공감, 연대는 씹다 버린 개 껍데기로 전락한다.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고 슬픔은 냉소를 넘어 허무로 진화한다. 저들의 공정, 정의 따윈 한마디로 니에미 씹이었다. 역사로부터 배운 게 없으니 망조는 이미 든 셈이다. 지난 일은 관심도 없고 앞날의 걸림돌이라 생각하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간신 밉보지와 어깨동무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허위를 뛰어넘어 진실의 돌파구를 열어야 함께 어울려 사는 대동 사회가 온다. 그러자면 더러운 대물림은 단칼에 끊어야 한다. 반혁명 또한 그게 내 팔다리라도 눈물을 삼키고 내쳐야 한다. 세상의 부조리한 분노는 슬픔의 파도로 다가오다 허망한 물거품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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